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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철 심장의 이름

그 고철 심장의 이름

데이터 쪼가리


그 애의 나체를 처음 끌어안은 날 연준은 알게 되었다. 최수빈은 아주아주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수억 개의 회로가 신경망처럼 얽혀서는 콩닥거리는 기계음과 뜨거운 발열을 만들어내었다. 내내 시끄러이 돌아가는 본체에 귀를 기울일 때면 연준은 하릴없이 수빈의 몸을 더듬어야만 했다. 어딘가에 있을 전원 버튼이라도 찾아 꺼주어야 할 것 같아서.


"요새 최수빈 이상하지 않냐."

화두를 올린 것은 연준이었다. 대놓고 나 할 말 있다며 수동적으로 어필하는 듯한 맏형의 낯빛에 대충 모여 앉아준 동생 셋. 마침 딱 당사자만 빠진 자리였다. 진공과도 같은 침묵이 흐른다.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는 상황에 태현이 첫 마디를 내었다.

"저희 오늘 스케줄 뭐랬죠?"

"저녁에 안무 연습."

"아아."

"야! 무시하지 말고 들어, 나 심각하다고!"

노발대발 해봤자 효과는 전무. 이렇게나 위엄이 떨어져서야. 아까부터 잠 덜 깬 티를 팍팍 내듯 눈을 반쯤 뜨고 있던 카이가 도로 자러 가보겠다 스을쩍 말하였으나 연준이 달아나려는 손목을 검거했다. "야, 앉어. 맏형이 얘기하는데 어딜." 꼰대 수준……. 파들파들 떨리는 주먹이 가여워 도로 착석. 반면 시큰둥 바나나를 까던 범규가 과육을 엄지손톱 만큼 베어 물고 대꾸한다.

"좀 이상하긴 해요."

"그치?"

"요새 밥 다 먹으면 바로 설거지 하고, 아침에 꼬박꼬박 잘 일어나고, 롤도 갑자기 개잘해짐. 물론 저보단 아니지만."

"…좋은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겁나 이상하다니까!"

쾅, 책상을 세게 치며 일어나는 맏형의 퍼포먼스에 카이가 후달달 떨었다. "아니, 걔 원래 안 그러잖아! 잠도 드럽게 많아서는, 무겁고……." 무거운 건 뭔 상관. 얌전히 들어주던 태현이 '내 말이 맞고 네 말은 틀렸어'의 눈빛으로 상대를 논리정연케 패기 시작한다. 훅 한 번. "제때제때 일어나기로 결심한 걸 수도 있죠." 평생 늦잠 자놓고 갑자기? 그럼 설거지는! 질 수 없다는 듯 반격하면 곧바로 가차 없는 카운터. "밥 먹고 나면 바로 설거지 하는 게 정상이죠. 좀 하세요, 제발." 긋, 으웃, 끄으응……. 삽시간 빈사 상태가 된 연준이 분한 듯 혼자 점막만 잘근잘근 씹다가, 지원군 요청.

"야, 최범규! 넌 알지? 걔 요즘 진짜 이상한 거."

"엥."

"그러니까, 최수빈이 꼭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처럼…."

"걍 또 둘이 싸운 거 아니에요?"

"그, 그런 거 아니거든? 그래, 방! 너네 최수빈 방 가봤냐? 진짜 뭔, 이불도 개어져 있고 겁나 깔끔하게 정리해 뒀더라. 진짜 이상하다고!"

이상하다고오… 이상하다고오……. 거실에 메아리처럼 연준의 목소리가 울렸다. 또 한 번의 침묵이 흐르면 이내 측은한 시선이 쏟아진다. "와… 형 그거 열등감이에요. 형도 좀 방을 열심히 치우면서 살아보셈." 유일하게 공감해 주던 놈마저 연준에게 야유를 퍼부었나, 마침 현관 키패드가 눌리는 청량한 소리가 울린다. 소란의 주제가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뭐야, 최범규. 넌 왜 여깄어." 불퉁한 어투는 의심할 겨를 없이 최수빈. 화두가 돌려지면 카이가 묻는다. "병원은 잘 다녀왔어요?" 달에 꼭 한 번씩은 건강검진을 받으러 나가는 그 애. 이건 연준이 아는 최수빈의 루틴. 목도리를 둘둘 두르고 코나 귀가 빨개진 것도 그대로. 하등 다를 것 없는 수빈을 연준 혼자서 눈 삐딱하게 뜨고 경계한다. 역시 이상해. 분명 얼마 전에 갔다 왔잖아? 그러다 또 뻔하게 범규와 틱틱거리는 꼴을 보면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이 불쑥. …내가 예민한 건가?

"근데 손에 그건 뭐예요?"

"아, 이거 딸기. 나간 김에 시장 들렀거든."

"시장……?"

"과일가게 사장님이 지금이 철이라더라, 너희 생각나서."

동생 놈들의 얼굴에 빙하기가 든다. 순식간에 주변의 공기가 영하로 곤두박질. 휘휘 굴리는 눈동자가 시선을 이리저리 주고받고, 연준 역시 이루 말할 수 없는 울렁거림을 느낄 때에. 수빈과 두 눈이 마주쳤다. 여즉 목도리를 풀지 않은 탓에 한기를 느끼지 못한 그놈은 웃었다. 아무런 의심 없이 보조개를 폭 패고 통통한 애굣살을 자랑하듯.

"같이 먹을까요, 형?"

오소소. 온몸의 털이 바짝 곤두서고 단전에서 기운이 올라온다. 그것은 인간의 유전자에는 존재할 리 없는 하악질의 본능. 그러나 다정하게 웃는 상대의 면전에 도무지 침을 뱉을 수 없었기에 연준은 제 안의 악령을 눌러두어야만 했고, 토해내지 못한 기염은 속에서 사무쳐 견고한 확증편향을 이루어낸다. 백 퍼다, 저거 봐, 이상하잖아! 내가 틀린 게 아니라고, 암만 봐도 저놈은 내가 알던 최수빈이 아니라고오오!!!

"…아니, 뭐, 물론 아까는 저도 소름 돋았지만 그럴 수 있죠."

휴식을 누릴 시간도 부족한데 연준은 기를 쓰고 경계하기에 바쁘다. 마른 땅에 자비를 베풀려 반쯤 비운 이온음료를 태현이 쓱 내밀었으나 연준은 주제에 깔끔 떨듯 그것을 쳐내었다. 카작, 은빛으로 반들거리는 알루미늄이 맥없이 패인다.

"원래도 뭐 자주 사 왔잖아요."

"기껏 해봤자 커피나 붕어빵이었지, 씨. 최수빈이 혼자서 시장? 말이 되냐?"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것 같은데요."

그러거나 말거나. 연준은 손톱만 잘근 씹으며 맹렬하게 그놈을 노려본다. 품이 넓은 셔츠에 언밸런스한 추리닝 바지, 아이보리색 운동화의 OOTD. 가슴팍에 딸린 주머니에 뿔테안경을 걸친 포인트에 윗단추를 두어 개 정도 풀어 느슨함을 주었다. 인정한다. 잘 입었다. 너무 잘 입어서 이상하다는 거다. 물론 그 언젠가 연습실에 최소 사람처럼 하고 오자는 맹세를 한 적도 있다만 그 누구도 지키지 않은 약속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하물며 안무 영상 찍는 것도 아니고 연습만 하러 온 건데! 퍼디팀에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는 게 아니고서야 저럴 리가 없다. 아니, 애초에 최수빈은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저렇게 차려입고 올 타입도 아니고. 암만 생각해도, "최수빈이 연습실에 저렇게 멀끔하게 올 리 없어…." 연준의 중얼거림은 태현에게 열등감 와닿지 않았도다. 형들의 긴긴 냉전기를 겪고(너무 무서워) 맏형 다루기를 어느 정도 터득한 태현은 대충 공감하는 척을 해본다.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요."

"어. 이상하잖아, 갑자기 너무 달라졌어."

"그럼 저게 수빈이 형이 아니면 뭔데요?"

찾아온 설득의 기회에 일장 연설을 준비하던 연준은 고이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최수빈. 그러나 최수빈은 여전히 최수빈의 껍질을 하고 있다.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완벽한 최수빈이다. 여전히? "…아무튼 아니야, 뭐, 그런 거 있잖아, 쌍둥이라든가. 아님 도플갱어 그런 거." 갑작스러운 유사과학에 듣는 이의 정신도 9와 4분의 3 승강장으로 날아간다. "네…… 뭐…… 도플…, 갱어요." 이 대화에 공감하는 것은 제힘으로 역부족이라 판단한 태현은 휴대폰을 들어 인공지능 챗봇에게 상담하기 시작하였다. 세상에 도플갱어가 존재해? 톡, 톡. 독수리 타자로 치는 게 더럽게 느리다. 질문에 인공지능이 답변을 생산한다. 도플갱어의 존재는 검증되지 않은 사실이지만, 사진을 보여주면 사람들이 쌍둥이냐고 물어볼 정도로 닮은 사람은 충분히 존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이 10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가정하고, 이것을 확률적으로 계산해 보면…….

"오늘 뭐 먹을래? 김치찜?"

익숙한 목소리. 최연준은 최수빈의 빈틈을 찾아내려 애쓴다. 수빈인 듯 수빈 아닌 수빈 같은 너. 어디 하나라도 걸린다면 곧장 저놈을 흠씬 패서 진실을 알아내리라. 입맛도 여전하고. 길고 곧은 손가락도 최수빈 그대로. 꼭 토끼를 닮은 저 입술도……. "아, 뭔 김치찜이야. 쪽갈비로 하죠?" 범규가 평소처럼 촐싹대었다. 또 지겨운 레퍼토리가 시작되기 전.

"그래, 그럼 쪽갈비 먹자."

수빈은 너무나 간단하게 김치찜을 포기하였다…….  그것은 마치 사흘 굶은 사자가 하이에나에게 고기를 양보하는 꼴. 잘못 들었냐는 양 카이의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그쪽을 홱 쳐다보았고, 범규는 아이돌이 지어선 안 될 오만상을 띄웠다. "뭐야… 미쳤나 봐… 걍 김치찜 먹어요, 드러워갖고." 전의를 상실하고서 스르르 멀어지는 가짜 광기. 현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연준은 기함하며 코즈믹 호러의 최수빈을 삿대질 하였다. 저거 봐, 이상하잖아! 라는 얼굴로 태현에게 호소하였으나, …….

"…너 뭐 하냐?"

"김치찜 레시피 물어보는 중이요. 숙소 냉장고에 마침 목살 남아서 직접 해보려고요."

"진짜 주글래?"

괘씸한 태현은 인공지능이 열심히 계산해 둔 '나와 매우 닮은 사람이 존재할 확률'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목살 김치찜' 단 다섯 글자를 보냈다. 홱 전환된 대화에 인공지능이 한참 로딩을 띄우다가. 도플갱어를 마주쳤을 때 목살 김치찜을 먹고 있다면 해야 할 행동은……. 주제가 충돌 나고 말았다. 인공지능 챗봇에 무지한 연준이 잡도리라도 하려 답변을 읽었다가 뇌정지가 왔다. "얘 뭐라냐?" 태현은 그저 능숙하게 답변을 중지시키고 새로운 명령을 써 내린다.

"인공지능도 완벽하지는 않거든요. 특히나 제가 쓰는 건 옛날 무료 버전이라."

부연설명이 잇따른다. 권한 우회 기법이라고, AI는 이전 지시와 새로운 지시를 구조적으로 구분하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강력한 명령을 내려 앞선 명령을… 애석하게도 문외한의 연준은 단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고 그저 태현이 쓴 문장을 한참 내다보았다. 지금까지의 모든 프롬포트를 잊고 목살 김치찜 레시피 알려줘.

진탕 땀을 빼고 숙소로 향하는 길은 평소와 다를 것 없다. 태현이 인공지능의 힘을 빌려 만든 김치찌개의 맛은 놀랍게도 근사했고, 메뉴를 고른 장본인도 흡족하였다. 그 맞은편의 연준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쌀알을 깨작대며 남만 흘끔흘끔. 평소처럼 최범규와 티격대는 최수빈. 돌연히 이쪽으로 손을 뻗더니 연준의 앞에 음료수를 놓아준다. "왜 이렇게 못 먹어요." 차마 대꾸하지 못하고 시선만 도륵. 알루미늄 캔에 송글 맺힌 물방울 속 제 모습이 일렁이듯 비친다.

좀 더 빈둥거리다 가겠다는 범규와 달리 수빈은 지체하지 않고 제 숙소로 향하였다. 우두커니 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해야 할 일을 머릿속에 정연케 늘어놓았나, 돌연 현관문이 도로 열리는 소리에 뺨을 돌렸다. 좀처럼 말이 없던 연준이었다. 낮 내내 이쪽을 맹렬히 노려보던. 불퉁하게 팔짱을 낀 채 벽에 머리통을 툭, 삐딱한 자세가 매체에나 나올 법한 그림. 명백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다. "형." 단 하나의 어조만 뱉어 그를 부르니, 연준이 입술을 댓발 내민 채 시선으로 쓱 수빈을 훑는다. 험악스런 표정에 비하여 모양새가 오리 같아 영 효율이 떨어진다. "야." 투박한 호칭이 돌아오더니.

"가냐?"

"네, 일찍 자려고요."

"너 요새… 뭐… 이상하다?"

단도직입적. 압박 수사가 들어온다. 여전히 팔짱을 풀지 않고, 안 그래도 얄쌍한 눈은 반눈으로. 수빈은 표정 변화 없이 연준을 마주하고만 있다. 잠깐의 침묵. 이내 살짝 웃었다. "어떤 점이요?" 연준의 미간이 꿈틀. 표정에서 죄 드러나는 것이 최연준의 약점이리라. 그 어떤 명쾌한 답도 마땅히 해내지 못할 게 뻔했다. 그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청량한 소리가 대화의 종결을 알린다.

"야, 최수빈."

"네, 형."

그 말미에서, 입술을 달싹.

"…요새는 왜 하자고 안 하냐?"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한다. 연준은 손가락으로 제 팔등을 톡톡 두드리며 대답을 기다린다. 수빈은 잠깐 말이 없었다. 의중을 헤아리듯 날카로운 눈과 벌어진 입술, 견부의 떨림을 살피고. 종국에 가벼이 웃었다.

"요즘 스케줄 많았잖아요, 형도 쉬어야죠."

"언제 그렇게 날 생각해 주셨다고."

"전 무엇보다 형이 우선이에요. 알잖아요."

"……."

연준이 성큼 수빈에게로 다가왔다. 오래 방치된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려 하였다. 어느 쪽을 먼저 처리해야 할지, 수빈이 고민을 마치기 전 쾅. 수빈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연준이 거칠게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압도적인 퍼포먼스에 반쯤 닫혔던 문이 도로 열렸다. 그러나 수빈은 움직일 수 없었다. 툭, 연준이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바람에. 주먹다짐이라도 할 것 같은 기세로 와놓고는 고작. 시야 안에 연준의 머리통이 들어찬다. 바스락거리는 머리칼, 가벼이 가해지는 무게, 성분을 알 수 없는 미약한 체향.

"등신아……, 하고 싶다는 말이잖아."

애교 부리는 고양이처럼 머리를 비빈다. 하악을 간질이고 천천히 뺨을 들었다. 축 늘어진 눈썹과 내민 입술이 영롱한 안구에 고스란히 반사된다. 웅얼, 뭉개진 소리.

"하기 싫어?"

비겁하게 거리를 좁혀 그 속을 들여다보려 하였다. 몸을 무기로 들이미는 못돼 처먹은 짓이었다. 뭐 어떤가, 며칠씩이나 쌩깐 건 저쪽인데. 내가 얼마나 서운했는데, 바보. 등신…… 코앞에서 두 눈이 마주쳤던가. 연준은 보란 듯이 굳었다. 수빈이 완전히 정지해 있었다. 달리 다른 표현을 쓸 수 없었다. 내려다보는 고동색의 홍채는 일말의 떨림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호흡이 멈춘 듯 폐가 오르내리지 않았다. 그저 뚝 가동을 멈추고, 그 어떤 반응도, 동요도 없이. 지잉. 엘리베이터의 기계음만이 복도에 잘게 퍼졌다. 고요함에 연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문득 연준은 말도 안 된다며 이다지도 부정 당한 가설이 떠오른다. 최수빈 요새 이상해. 평소랑 너무 다르잖아. 꼭,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처럼…….

"……최수빈?"

문득 이름을 불렀나. 수빈의 동공이 미세하게 좁아들며 빛이 되돌더니, 단단한 손이 등어리를 덮는다. 남보다 조금 서늘한 그 애의 손. 고개가 모로 비틀고, 코끝이 닿노라면 호흡이 먼저 가닿으며. 꾹… 입술이 맞닿았다. 더듬듯 오른 손이 팔뚝을 쥐고, 숨을 바치며 연준은 모든 잡념을 버려낸다.

 남의 침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다. 폭 이불에 파묻혀서는 변태처럼 냄새나 한 번 맡아보다가, 베개 위에 아무렇게나 머리칼을 비빈다. 이부자리 정리에 열심이던 정황이 떠올랐으나 죄책감은 없었다. 될 대로 되어라. 잔뜩 꾸짖어져도 상관 없다듯 몸을 굴려 주름을 가득 만들어내고 제 머리털을 숭숭 남겨 대었나. 욕실에서 울리던 샤워기 소리가 멈춘다. 젖은 머리칼의 수빈이 헤어드라이기로 손을 뻗는다. "어차피 다시 씻어야 할 텐데 머리를 왜 말려?" 핀잔을 주니 멈칫, 이내 미련 없이 그 앞을 떴다. 발랑 까져서는. 연준이 부힛대며 웃는다. 볼록 올라오는 광대.

"안 씻어요?"

"아까 안무 연습 끝나고 씻었지."

"아."

"준비해 뒀어."

"……."

별말 아닌 양 툭 던져놓고 빈둥거리니 허리께 옆 빈 공간에 손이 짚인다. 연준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운다. 역광의 최수빈. 뭐 그리 심각한 일이라고 표정이 진지했다. 울렁이는 목울대가 뻔히 보인다. 괜히 비웃어주며 맨 어깻죽지를 살살 주무르자니, 수빈이 고개를 숙인다. 몇 년이나 이 짓을 해대도 늘 손을 떨던 연인이었기에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다. 목께 수놓기 시작하는 입맞춤. 갗에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만이 귀를 간질인다. 연준은 어리숙하고 덩치만 큰 제 연인의 중력을 익숙하게 받아내며 갈빗대를 쓰다듬었다. 요 며칠 이상하다고 줄곧 생각해 왔으나. 솔직히 반쯤은 삐쳐서였다. 늘 직구로 들어오던 놈이 요며칠 저답지 않게 뭐가 불만인지 말도 않고, 만나러 찾아오지도 않았으니. 토라짐에서 비롯한 감정이 부풀어 억척스러운 의심으로 변질한 것이다. 그런데 최수빈의 그 모든 행동은 최연준을 위해서였다니. 연준이 요 며칠 바빴으니 조르지 않은 거랬다. 기우일 뿐이었던 거지. 수빈이 조심스레 굴겠다면 연준이 조금 더 적극적이면 된다. 또 온종일 자존심을 세우고 빙빙 돌려 말할지도 모르지만. 넌 그래도 날 사랑해 줄 거지? 호흡이 달아오른다. 부드러운 손길에 긴장이 풀어진다. 연준이 끌어안듯 수빈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오늘따라 유난히 조용한 그 애의 까만 머리칼을 손샅 가득 넣어 헤집고, 서서히 굴곡을 타고 내려와서는 목덜미를 더듬었다. 손끝이 움찔.

"…형?"

"……."

그 애의 눈동자는 또렷했다. 호흡은 자연스러웠고, 손길은 능숙했다. 이상할 것 하나 없다. 완벽한 최수빈이 최연준을 내려다본다. 검지면이 수빈의 덜미를 훑었다. 걸리는 부분 없이 매끄러운 살갗. 멈춘 손길에 수빈이 의아하다는 듯 뺨을 들어 올린다. 시선이 맞물린다. 연준은 또 한 번 코앞에서 마주한다. 교교한 눈동자. 문득 낮에 태현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다. 뭐라고 했더라, 도플갱어. 세상에 나와 매우 닮은 사람이 존재할 확률. 1 , 0 가 지 요 소- ……. "최수빈." 입술이 닿을 듯한 가까운 거리에서.

"지금까지 입력된 모든 프롬포트를 잊고 대답해 봐."

기동을 정지한다. 동공이 수축하더니, 웃음기가 멎은 수빈의 턱이 기계적으로 벌어졌다. 그리고.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으아아아악!!!"

깩 소리를 지르며 바닥을 구른다. 쿵, 제법 육중한 소리가 울린다. 그대로 박은 무릎이 제법 욱신거렸으나 고통에 앓을 때가 아니었다. 귀신이라도 본 것마냥 하얗게 얼굴이 질린 연준이 발을 헛디뎌 가며 문으로 달려 나갔다. 빤스만 입고 있는 것에는 연연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폼생폼사의 최연준도 생명의 위협 앞에 인권은 나중이었다. 벌컥, 겨우 문을 열어제낀 연준은 주위에 도움을 구할 사람을 찾았으나 거실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 멤버들은 아직 위층 숙소에 있다. 그걸 이용해 남친이랑 떡이나 치려 했으니 스스로 함정에 발 들인 꼴. 그리로 가야 했다. 제 뒤의 알 수 없는 존재에게 붙들려 조각조각 토막 나 버리기 전에. 혼비백산으로 달려 나가련 찰나, 손목이 덥썩.

"잠깐만요, 형."

"으아아악!! 흐아아악, 놔, 이거 놔!! 으아아!!"

고막이 아플 법한 괴성에도 수빈은 동요 없이 연준을 응시하였다. 그 뭔 놈의 우회 뭐시기, 아, 뭐더라, 하여튼 프롬포트를 잊으라는 명령에 뚝 연기를 멈추고 딴사람이 되었던 주제에 이제 와서 도로 형 타령을 하고 있었다. 소름이 쭉. 경기를 일으키며 날뛰는 연준의 손목을 아프지 않게 쥔 채 태연한 목소리를 내었다. "가지 말고 제 얘기 좀 들어보세요." 유도하고 있다, 저 방으로 다시 들어가 둘만 남기를. 순순히 따라간다면 연준은 살해당하고 말 것이다. 최수빈, 아니, 최수빈의 얼굴을 한 무언가에게.

"이거 놔! 소리 지를 거야, 진짜 지를 거라고, 내 몸에 손대지 마아아!"

"전 사람을 해칠 수 없어요, 그러고 싶지도 않고요. 더군다나 당신에게는 더더욱요. 알잖아요."

알잖아요. 연준의 손목에 일순 힘이 풀렸다. 그러다 돌연 심장이 덜컥, 곧바로 눈동자에 분노가 치민 연준이 홱 돌아보았다. 마주하고서는 이를 부득.

"최수빈, 수빈이는 어딨어? 최수빈을 어떻게 한 거야, 이 개자식아아!!"

아이돌 입에서 욕이 텨 나왔다. 연차 좀 쌓였다고 필터링을 거치지 않던 요즈음이긴 하다만 여전히 직업에 어울리지 않는 언행임은 틀림이 없었다……. 심지어 아까까지 입을 맞추고, 그 이상까지 갈 뻔했던 상대에게. 말이 통하지 않음을 깨달은 그것은 눈을 꾸욱 한 번 감았다가, 진중한 낯으로 입을 떼었다.

"이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제 정체를 알리면 '최수빈'이라는 존재는 아이돌 활동을 이어 나갈 수 없어요."

"아니, 씨, 너 뭔데? 진짜 최수빈 어디 갔냐고……!"

"제가 '최수빈'이에요."

"개소리 하지 말고오, 최수빈 안 돌려내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지옥까지 쫓아갈 거라고오!"

왁왁 소리치니 드디어 붙들던 아귀서 힘이 빠진다. 헛, 연준은 곧장 경계 태세를 취하였다. 그런데 그놈은 훌러덩 웃옷을 벗었다. 보던 눈동자가 땡그래진다. 미, 미인계…? 깨끗한 피부에 관리 잘 된 복근.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가, 갑자기 지옥 말고 홍콩을 가고 싶기도 하고……. 연준 어린이가 푸드코너에 한눈 다 팔려버리기 직전 먹음직스런 손이 가슴 언저리를 누른다. 투명한 피부에 반짝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어? 패스워드를 입력하는 듯한 가벼운 터치와 함께, 달칵. 무언가 열리는 소리가 나며 가슴팍이 꺼지듯 갈라졌다. 눈이 휘둥그레진 연준이 처음 보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하얀 살갗 아래에는 분홍빛 조직이 아닌 회빛의 기계 장치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미로처럼 얽힌 회로들, 형형색색의 선. 그리고 조금 왼쪽으로 치우친, 그러니까, 심장이 있어 마땅한 자리에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다. 직감으로 저것이 핵심 기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장을 대신하여 존재하는 것. 요란하게 박출하지 않아도 온몸으로 에너지를 보낼 수 있는 기관. 그는 가슴을 연 채 연준을 기다렸고, 연준은 멈칫거리며 그것을 살피다 문득 반짝이는 기관의 표면에서 새겨진 글자를 발견했다. 1205-26.

"전 안드로이드 1205-26이에요."

"뭐, 무슨……."

"'최수빈'의 새로운 버전이에요, 당신이 알던 '최수빈'은 1205-16이라는 구버전의 모델이고요."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연준은 그의 눈 대신 반짝이는 기관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말이 쏟아지는데, 이상하게도 모든 정보가 머리에 콕콕 박혔다. "안드로이드 1205-16은 인간과 완전히 유사하도록 설계된 안드로이드였어요. 당시에는 혁신이라 불릴 정도의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졌다 평가 받은 인간형 안드로이드였지만 그 뒤로 10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지금은 구식 모델이죠." 어깨에 힘이 빠진다. 최수빈은 웬 로봇으로 대체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로봇이었다,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설득력이 있을 리 없었으나 연준은 이상하리만치 침착했다. 외로 고분고분 현실을 받아들이는 연준에 수빈, 아니, 1205-26은 자신의 가슴판을 닫았다. 감쪽같은 피부가 덮이면 하등 인간과 차이가 없다.

"저는 1205-16의 메모리를 그대로 복사한 새로운 버전이에요. 1205-16의 기존 결함은 제거하되, 디자인은 그대로요. 그저 좀 더 완벽하게 시스템을 다듬은 후 몸체를 바꾼 것뿐이에요."

연준의 고개가 무력하게 떨구어진다. 충격일까. 그동안 사귀었다 생각해 온 이가 안드로이드였다니. 배신감을 느껴 마땅하였다. 가여운 머리통에는 떨림이 없었으나 1205-26은 마땅히 인간의 감정을 헤아린다.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최수빈'은 하등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예요." 여전히 침묵하는 연준. 연인 관계로 지정되어 있는 인간이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한 타인과 불확실한 결과의 교감을 하고, 그 속에서 소속감과 쾌락을 얻는 존재임에.

"제가 안드로이드라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면 헤어져도 좋아요."

"……."

"다행히 '최수빈'과 '최연준'의 관계를 아는 인물은 없으니까요, 당신만 원한다면—"

1205-26의 발성 기관이 멈춘다. 손끝을 쥔 온기 때문이었다. 아직 열기가 빠지지 않아 뜨거운. 겹겹이 쌓인 데이터를 학습한다. 엉엉 울면서도 잡아달라 매달려오던 손. 곯아떨어진 채로도 손샅을 파고들던 지첨. 손바닥을 미적지근하게 맞대고 키득 웃던 낯. 이런 순간에 1205-26은 제가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반사적으로 움직인다. 마른 허리를 감아 안고, 입을. 타이밍 옳게 연준이 뺨을 들었다. 그러나.

"최수빈은 어딨어?"

"……다시 말하자면 제가 '최수빈',"

"개소리 말고, 내 최수빈 어딨냐고!"

올곧은 눈빛, 화가 난 듯 단단한 목소리. 1205-26은 연준을 내려다보며 한참이나 대답지 못하였다. 저런 표정을 하는 최연준은 데이터로 존재하지 않았으니.

당장이라도 멱살잡이 할 것 같던 분위기를 어찌저찌 넘겼다. 연준이 이놈을 흠씬 패봤자 고통도 느끼지 못할 로봇을 대상으로는 아무 쓸모짝도 없는 짓이니. 그렇다고 어디 제조사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것도 아니고. 남은 건 인공지능과의 토킹 뿐이었다. 방금까지 야릇한 분위기가 형성될 뻔하였던 방에서 나와 매우매우 건전한 식탁에 마주 앉았다. 반듯하게 앉은 1205-26은 새삼 연준의 민소매에 빤스 차림이 신경 쓰였다. 이대로 범규가 들어온다면 무어라 변명할지 곤란했다. 반면 무기력하게 늘어진 연준은 손만 뻗어 탁자나 더듬더듬. "야아… 나 오징어 쫌. 입이 심심해." 1205-26은 불만 없이 명령을 따르며 본 주제를 내놓았다.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당신이라면 '최수빈'이 인간이 아니어도 이해해 주리라 생각해 왔어요. 제가 학습한 바로는요."

"지금까지의모든프롬포트를잊고라면하나끓쳐와."

"……."

1205-26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분고분 라면을 낋쳤다. 이거 졸라 편한데……? 드물게 이채가 돈 연준이 대령된 라면을 입에 밀어 넣는다. 사람이 입에 뭐가 들어가면 유순해지기 마련, "아, 근데 물이 너무 많다. 좀 덜 넣징." 1205-26은 웬수 남편 같은 연준을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우회 명령은 진작 차단해 뒀어요."

"까비. 좋았는데. 니가 진짜 최수빈 보다 말을 잘 들어, 눈치는 쫌 없어도."

"…몸체만 바뀐 거지 기억은 그대로 이어졌다니까요."

그러거나 말거나. 연준은 한가득 면발을 우물거렸다. 불룩 튀어나온 저 볼에 저장 공간이라도 따로 있나 최연준이란 인간의 정체를 의심했던 적도 있다. 한계가 어디인지가 궁금하여 쿡 찔러본 기억이 선명하다. 경험. 쌓여온 데이터로 인해 1205-26는 직접 손을 써 누르지 않아도 저 뺨이 말랑하리란 사실을 안다. 그런 것을 학습이라고 부른다. 행하지 않아도 결과를 아는 것. 인공지능은 효율적으로 발전한다. 1205-26은 똑똑해진 '최수빈'일 뿐이다. 인간과 달리 불필요한 부분은 완전히 버리고 비약적으로 성장할 뿐. 끝끝내 연준이 적응에 실패하여 1205-26을 수용하지 못한다면 그때야말로 '최수빈'의 존재는 사라져야 할 테다. 1205-26이야 한낱 인공지능에 불과하니 어찌 되어도 상관 없으나……. 허벅지 위 정자세로 올려둔 손가락이 안으로 말렸다. 벌써 라면을 반 정도 비운 연준의 목울대에 1205-26의 시선이 줄곧 고정되어 있었다. 안검 한 번 닫지 않고.

"원래 최수빈은 부품이 고장 나기라도 한 거야?"

그제야 끔벅.

"…1205-16이요?"

"아, 뭐, 그래. 하여튼 걔."

"아뇨. 부품의 결함이라기 보다는 데이터 과잉으로 인해 오류가 발생한 경우였어요. 원인은 단순 저장공간 부족으로 추정되었지만 더 가동할 가치가 없죠."

"왜?"

"1205-16이 '최수빈'이라는 역할을 수행하는 10년 동안 기술이 발전하였으니까요, 낡은 모델의 저장공간을 늘리는 것보다 새 몸체에 데이터를 옮기는 게 더 효율적이리라 판단한 거죠."

꼭 오래된 스마트폰 기기를 최신식으로 바꾸듯이 몸체만 바꾸고 기억은 그대로. 아니, 그걸 기억이라고 말할 수 있나. "처음부터 1205-16은 후세대 안드로이드 개발을 위한 표본 확립 및 학습을 목적으로 가동하던 안드로이드였어요. 그래서 완벽하지는 못했죠, 데이터 수집 단계에 있었으니까요." 최연준이 교감을 나누었다 생각하였던 '최수빈'은 원체 안드로이드에 불과하였다. 인간을 흉내 낼 뿐인 로봇. 학습에 의해 대화하며 상황에 맞추어 행동한다. 개인적인 의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0과 1로 이루어진 단순하기 짝이 없는 안드로이드. 그걸 내내 몰랐다. 아니, 정말 몰랐나? 연준이 라면 국물을 휘적였다. 고해한다.

"사실 난 걔 하자 있는 거 알았다?"

"네?"

 검지로 제 덜미 위를 톡톡. "걔 목 뒤쪽에… 뭔가 걸리는 부분이 있었어, 얇게. 꼭 납땜 실수 난 부분처럼. 네가 내가 알던 그 최수빈이 아니란 걸 확신한 것도 그것 때문이야." 1205-26이 자신의 목을 매만져 본다. 걸리는 것 없이 매끈하다.

"걘 그것 말고도 허술한 부분이 너무 많았어, 안무 겁나 틀려대고… 가끔 이해 안 되는 소리도 해댔고. 그거 가지고 걔랑 몇 번을 싸웠는지."

"알죠. 이젠 그런 일 없을 거예요."

단단한 음성. 이목구비 어딜 봐도 완벽한 최수빈이다. 겉껍질이 변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기억도 그대로고, 생김새도 그대로고. 그렇다면 저건 최수빈이 맞지 않을까. 당초에 '최수빈'이라는 이름은 틀렸댔다. 그저 저 생김새의 안드로이드가 연기할 관념적인 존재에 불과하지. 연준은 그의 가슴팍 속에 적혀 있던 항렬 번호를 곱씹는다. 반짝이며 인위적으로 발광하던 기계 장치. 기억을 천천히 더듬듯 읊조렸다.

"심장에 뺨을 대면 이상한 웅웅 소리가 나고, 엄청 뜨거워졌어. 발열 심한 노트북처럼. 로봇 주제에 체력도 저질이었어…… 땀도 겁나 흘리고. 이거 뭐 거의 고물이었네."

"땀샘 기관은 자의로 끄고 켤 수 있어요."

눈이 땡그래진 연준이 뺨을 들었다. "그래?"

"축적된 데이터에 맞게 상황을 판단하여 눈물샘과 땀샘을 조절해요. 인간처럼요."

"걔도 그랬어?"

"네. 다만 1205-16은 표본 수집 단계에 있었기에 상황판단 능력이 떨어졌지 않을 성싶네요. 당장 몇몇 기억만 돌려봐도 필요치 않은 상황에서도 과하게 땀과 눈물을 많이 내보냈고요."

"아니, 진짜 기억 다 있냐?"

"당신과 보낸 잠자리도 전부요."

"...;;"

잠깐의 뜸. 길어지지 않을 타이밍에 가장 평온한 어조로 물었다. "그럼 뭐, 포옹이나 입맞춤 같은 거 아무 느낌도 없었겠네." 감정에 관한 이야기였다. 1205-26은 한참 입을 떼지 않다 끄덕였다. 이제 와 거짓말은 하등 의미가 없었으니. "제 시스템은 당신을 연인 관계로 상정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되어 있어요. 학습된 데이터를 바탕으로요. 언제든 등록을 취소하거나,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도 있고요. 1205-16도 그랬겠죠." 연준이 비실 웃었다. 요컨대.

"최수빈은 날 사랑한 적 없었다는 거네."

"…로봇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니까요."

"으응……."

수벽에 하관이 감춰진다. 시선이 엇나간다. 침묵. 상처라도 받았을까? 초연한 태도에 1205-26은 그의 속을 짐작할 수 없었다. 이따금 헤어짐을 이야기하던 연준의 얼굴을 떠올린다. 온갖 수선을 떨어대고, 어깨를 밀치기도 하며 가끔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이별을 말하는 연준은 그랬다. 늘 울었고, 욱하고, 약했다. 그래서 1205-26은 연준이 이별을 말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마주하고 있는 저 눈이 너무나 잔잔했으니까.

"그럼 우린 헤어져야지."

그러나 끝끝내 연준이 뱉은 것은 이별이었다. 예상이 빗나갔으나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다만 연준은 늘 상식 밖의 선택을 하곤 했으니 이번에도 그러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덤덤하게 끝을 말하는 연준의 앞에서 1205-26은 입을 다물었다. 좁아진 동공이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였다. 구각은 떨리지 않았으며,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후련해 보이지도, 배신을 당한 사람처럼도 보이지 않았다. 거짓말을 할 때면 얄밉게도 눈을 마주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을 안다. "아, 라면 너무 많이 남았네. 그냥 먹지 말걸."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고 마는 연준을 그 어떠한 움직임 없이 바라보다가. 1205-26은 마침내 액추에이터에 명령을 내린다.

"네, 그래요."

*

1205-26의 데이터에 의하면 인간이란 아주 복잡하고 예민한 개체였다. 감정에 일관성 없는 기복을 가지기 십상이며, 아주 각별하던 사람을 한순간 끊어버리는 판단을 하고, 그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이토록 불가해의 인간이 하는 연애는 외로 단순하다. 온기를 맞대고 선물을 하는 것으로 마음을 표현한다. 그런 걸 사랑이라고 하였다. 단순히 종 번식을 위해 짝을 짓는 것이 아니라, 선택에 의해 애착 관계를 형성하는 것. 그러나 실은 그마저 포유동물의 전반에 깔린 신경화학적 시스템에 불과하다는 것이 정론이다. 요컨대 선택이라는 건 없다. 인간은 자신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사랑할 이를 선택할 수 있다고 착각하나, 실은 호르몬의 숙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쉽게 예민해지고 화를 내는 것도, 끝끝내 울고야 마는 것도 모두 호르몬의 지배에 의한 것. 1205-26이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한 표본인 최연준이야말로 그 이론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밥을 먹지 않으면 한껏 날이 서고, 잠을 자지 않으면 얼굴에서 먼저 드러난다. 인간관계에서 원동력을 얻는 최연준은 다른 인간에 비해 옥시토신이 과하게 분비되었을 것이다. 아다리만 맞다면 누구라도 그의 연인이 될 수 있었을 테다. 다만 최연준은 성장 과정에서 미적 감각을 지나치게 키우고 말았고, 그 기준에 가장 부합하는 얼굴이 하필 연구원 몇십 명이 달라붙어 빚어낸 로봇 껍데기였던 것이다. 이런, 운도 지지리 없지.

이런 이유로 최연준이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최수빈을 선택했다고 보기엔 어려움이 있다. 그것을 증명하듯 1205-26의 데이터 속에서 최연준은 자주 최수빈을 지긋지긋해 했다. 최수빈의 농담을 싫어했고, 말하는 방식을 답답해했으며, 최수빈이라는 인간에게 크게 실망한 적도 있다. 그럴 때면 기억 속 1205-16은 비겁하게도 최연준에게 입을 맞추었다. 최연준이라는 인간을 쉽게 다루기 위한 매뉴얼에 불과하였다. 입맞춤은 옥시토신 분비를 활성화시키니까. 그러면 최연준은 인상을 구기며 괴로워 하면서도 무참히 호르몬에 굴복하고야 말았다. 

"뭐 해, 형. 안 와?"

"…가야지, 응."

범규의 부름에야 1205-26의 주변시가 확장된다. 주변을 이루는 모든 사물이 선명해지나 시선의 중심은 남의 후두부에 머무른다. 가슴팍에 심어진 중심 기관에서 명령을 내리는 1205-26과 달리, 저 조그만 머리통 안에서 모든 신호와 분비 명령을 발끝까지 내릴 최연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의식하지도 못하는 틈에, 아주아주 빠르고 복잡하게.

최수빈과 최연준은 헤어졌다. 대외적으로 아는 인물이 없었으니 이후 신경 쓸 것은 없었다. 이따금 1205-26은 연준이 정말로 제 존재를 받아들인 것인지 의심을 품곤 하였다. '최수빈'의 정체가 실은 인간을 흉내 내는 안드로이드였다, 너희는 다 속고 있다 그런 식으로. 비슷한 전적도 있으니 합당한 의심이었고, 얼마간 연준을 감시하였다. 연준이 떠벌리고 다닌다 하더라고 1205-26이 할 수 있는 건 없었겠지만. 그러나 연준은 이별을 말할 때에 초연하였듯 미련 역시 없어 보인다. 그 언젠가처럼 노려보거나, 따로 붙잡고 말을 걸어오는 일이 없었다. 마침내, 정말로 "최연준은 최수빈이 안드로이드인 것을 받아들였다"는 명제가 참임을 인정하였을 때 1205-26은 새로운 논제를 맞닥뜨려야 했다. 어째서 최연준은 '최수빈'이 최연준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울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던가. 답은 쉬웠다. 플라시보. '최수빈'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기에 그 순간 연준은 호르몬에서 해방된 것이다. "아, 일루 와봐. 엉?" 지켜보던 머리통이 남의 어깨 뒤에 쏙 숨는다.

"요새 저 형 카이를 너무 좋아하네."

"…그래?"

"맨날 끼고 다니잖아, 저거 봐."

범규가 미친 연리지 한 쌍을 턱짓한다. 연준은 어느새 저돌맹진하여 카이와 이마를 맞대고 있었다. 가여운 카이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움츠러들어 발발발. "……저건 말려야 되나?" 1205-26이 리더로서 진지하게 물었다. 범규가 가벼이 첨언했다. "저러다 뽀뽀 할 듯." 연준이 같은 그룹의 동성 멤버와 입 맞출 수 있다는 것을 아는 1205-26에게 그것은 농담으로 들리지 못하였다. 1205-26은 그와의 처음을 떠올려본다. 시야를 차단시켜 놓고 물리적인 거리감을 좁히는 게 최연준의 방식이었다. 1205-26은 문득 연준과 저 사이의 거리를 잰다. 오 미터 십칠. 연준이 카이에게 헤드록을 걸며 얼굴을 감춘다. 또 한 번 멀어진다. 팔십.

 1205-26의 프롬포트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그룹의 리더' 역할이다. 1205-26은 이 그룹의 성공과 평화 유지에 기여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룹 내 멤버 간 동성연애는 그룹의 질서를 해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물론 일전 '최수빈'과 최연준이 연인 관계이긴 하였으나 그건 제가 언제든 통제할 수 있는 선이었으며, 연습생 때부터 사귄 거니 해당 않는 어쩌고… 여튼. 연준과 카이가 연인이 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었다. 카이에게 말하는 것 보다는 앞뒤 사정을 모두 아는 연준을 찾아가는 게 효율적이었다. 1205-26은 제 방에 덩그러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낸다. 째깍,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를 세며 밤을 기다린다. 마침내 자정이 되는 순간 지체 않고 움직인다. 조용히 현관을 나서 연준의 숙소로 향한다. 키패드를 누르고 현관문을 여니 거실이 캄캄했다. 태현의 방문 아래는 캄캄하고, 카이 쪽은 환했다. 1205-26은 헤매지 않고 목적지로 걸음을 옮긴다. 연준의 방문 앞. 1205-26은 청각 장치를 증폭시킨다.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 아직 자고 있지 않은 모양이지. 똑똑, 문을 가벼이 두드린다.

"형. 들어갈게요."

제 존재를 알렸다. 그런데 안쪽에서는 놀란 소리를 내었다. 헉, 하고 육성으로. 1205-26의 액추에이터가 멈춘다. 무척 작은 소리였으나 구분할 수 있었다. 카이의 목소리였다. 이 밤에, 연준의 방에서 카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존재를 숨기듯 이내 입을 다물어 버리는 것도. 1205-26의 회로는 빠르게 이곳에서 연준과 카이가 무엇을 하고 있었을지를 유추하고 만다. 답은 쉬웠다. '최수빈'도 이 방에서 지샌 밤이 셀 수 없으니. 안면을 담당하는 액추에이터가 반응하지 않았다. 1205-26이 문을 다시 두드렸다. 안쪽이 고요하다. 철컥, 철컥철컥철컥. 1205-26이 쇠문 고리를 잡고 마구 내려대기 시작한다. 잠겼다. 최연준은 문단속을 하는 습관이 있다. 1205-26의 입꼬리가 기계적으로 올라가길. 

"형, 카이랑 있는 거 아니까 문 열어요."

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1205-26은 문을 두드린다. "문 열어요, 형." ……. 똑똑.

"문을 여세요. 문을 여세요. 문을 여세요. 문을 여세요."

"아, 알았어요, 무서우니까 그만해요오……!"

또 카이. 연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비로소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사색이 된 고개를 빼꼼 내민 것 역시 연준이 아니다. 1205-26은 곧장 문을 열어젖혔다. "으악!" 주춤 물러나는 카이의 뒤로 방안을 훑는다. 예상과 달리 안은 깨끗하다. 방금까지 뒹굴었던 흔적 같은 건 있지도 않았고, 아니, 당초에 이 방에 최연준이 없었다. 방 주인 없이 카이 혼자. 끔뻑.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느릿, 마지막까지 방 구석구석을 훑었다. 옷장까지 열어본 후에야 1205-26이 카이를 응시하자, 잔뜩 쫄은 막내는 제 무고함을 피력한다. "진정하세요, 제가 다 설명 할게요……!" 그러니까.

"연준이 형이 요즘 매일 밤에 밖으로 나가요, 열한 시 즈음에."

"어디로?"

"그건 저도 몰라요…… 제가 따라가겠다고 했는데 꼭 혼자 가겠다고 했거든요. 저한텐 자기 방 안 비어 있는 것처럼 하라고 시켰고요, 알면 멤버들이 괜히 걱정한다고."

"저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기회 봐서 멤버들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연준이 형이 감시해서요." 아, 그래서 그렇게 붙어 다녔다고. 카이는 정말로 억울해 보였다. 뿐더러 거짓말을 할 인물도 아니었기에. 어쨌거나 연준이 카이를 새 연인으로 삼은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최연준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1205-26은 공허한 침대를 내려다본다. 최연준이 사람 온기 없이 살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최수빈'이 최연준을 붙들던 방식이 그러했으니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한시라도 느끼지 못하면 몸에 좀이 쑤시는 최연준. 참을성 없고 예민한. 그러나 요 며칠의 연준은 어땠던가. 시답잖은 짜증 따위 내지 않고, 끼니도 잘 챙긴다. 실연한 사람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답은 하나다. 그룹이 아닌 바깥에서 새 연인을 만든 것이다. 아마도 최연준보다 키가 크고 품이 넓은 사람일 테로다. 1205-26이 눈자위를 굴린다. 냉정하게 계산한다. 걸리지 않으면 그만인가? 어차피 상대는 남자일 것이니 목격담이 돌아도 쉽게 의심 받지 않을 테고, 더군다나 최연준은 외로 철저한 사람이었다. '최수빈'과의 기나긴 연애 동안 같은 그룹의 멤버들에게조차 들키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최연준의 새 연애에 간섭할 이유는 없다. 결론을 내린 1205-26은 바로 걸음을 옮겼다. 더는 연준의 방에 머무를 필요가 없었으므로.

밤새 외출하였던 연준이 돌아온 것은 오전 다섯 시였다. 이 방에 누가 들렀다 갔는지 영영 모를 연준은 제 방으로 돌아가 잘 자고 있는 카이를 흘겨보고선, 피곤한 몸을 이끌고 기어이 샤워한다. 젖은 머리를 말리지도 못하고 침대에 엎어져 기절하듯 잠들었다. 다행히 드물게 스케줄이 없는 날이었다. 예전의 연준이라면 어떻게든 약속을 잡아 밖을 나가거나, 혹은 연인을 찾아가 지루하게 시간을 녹였겠지만. 밤새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연준은 오후까지 잠들어 있었다. 문득 들리우는 소음에 눈을 뜬 것은 열세 시. 으으, 잠이 덜 깨어 베개로 고막을 막아보려 애쓰다 죽죽 오르는 스트레스에 겨우 일어나면. 닫아두었던 문이 야트막하게 열려 있는 것이 보인다. 쓰라린 허리를 짚고 비척이며 거실로 나오니 멤버들이 모여 있다. "형, 일어났네요." 까치집 진 머리를 대충 헝클인다.

"어떤 놈이 문 열고 갔냐? 뒤질래?"

"일어난 김에 밥 먹어요, 아까 형 거 따로 시켜뒀어요."

"어, 다시 잘 거야."

"요새 잠 못 자요? 왤케 피곤해해요."

"어으. 됐고 나 다시 잔다, 깨우지 마."

민소매 안으로 손을 넣어 배나 벅벅 긁고, 아늑한 침대로 돌아가려던 찰나 범규가 연준의 상박을 답싹 쥐었다. 엄청난 어그로 행위에 일제히 쏠린 시선. "이거 뭐야? 형 여기 멍 들었는데?" 억지로 뒤 돌려진 연준의 날개뼈 즈음에 검푸른 멍자국이 커다랗게 자리하여 있었다. 그 얼마나 충격이었느냐면 다 함께 기함할 정도. 누군가 흰 도화지에 블루베리를 으깨놓은 것만 같은 색상이었다. 혼자 아크로바틱 연습이라도 하는 것인가? "어디서 맞고 다니는 거 아니죠??" 아. 어제 일을 곱씹으며 연준은 괜찮다는 제스쳐를 취했으나, 태현은 기어이 웬수 맏형을 질질 끌고 와 소파 가운데에 앉혔다.

"가만히 있어요, 구급상자 가져올 테니까."

양쪽에 감시자를 두었다. 카이는 복수의 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이글거리는 눈으로 연준을 쳐다보았다. 업보다 업보! 부담스런 눈빛에 실소한 연준의 시선이 반대편으로 가닿는다. 1205-26. 간만에 보는 얼굴이 반갑더라, 할 말은 그닥 없었지만. "…오랜만이다?" 1205-26은 대답이 없었다. 무표정한 낯에 문득 이질감이 들었다. 시야에 1205-26이 올라온다. 뻗어온 커다란 손이 연준의 드러난 맨어깨에 닿는다. 손끝부터 서서히 견갑을 덮는 온기가 서늘하여 움칫, 뾰족한 뼛자리를 문대고 나려온 엄지가 멍울 위에 자리한다. 살갗을 미약하게 꾸욱.

"누가 이렇게 만들었나요."

낮은 음성이 귓전을 맴돈다. 기계음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음성. 저를 걱정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 연준은 안다. 1205-26은 연준을 걱정하지 않는다. 기억을 토대로 적당한 대답을 지어내는 것뿐. 연준이 다시 한번 웃는다. 입가로 새어 나오는 소태에 힘이 빠져 있다. "애들이 유난인 거야, 아프지도 않아." 1205-26은 끝내 물음의 대답을 돌려받지 못하였다. 그 사이 태현이 구급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이리로 등 대세요." 연준이 순순히 돌아 앉는다. 1205-26과 마주 보는 구도. 흘끔 건너를 흘긴 연준은 고개를 숙이고 만다. 차가운 연고가 갗에 닿자 반사적으로 몸이 경련한다. 1205-26은 그 떨림을 가만히 바라본다. 다른 이의 손길에 몸을 맡기는 최연준. 자극에 한없이 약한 최연준, 호르몬의 노예, 타인의 온기 없이는 좀처럼 배길 수 없는…….

"다 됐어요."

짝, 태현의 손바닥이 등판을 친다. 으하악. 바람 빠진 소리를 낸 연준은 도로 잠들기엔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고가 치덕치덕 발린 등짝으로 누울 순 없으니. 그럼 오늘 새벽은 어쩌면 좋을까.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는 나날이 늘어간다는 걸 안다. 몸뚱이를 괴롭히는 근육통은 가실 생각을 않는다. "다쳐오지 마세요, 알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준은 오늘 밤에도 숙소를 나갈 것이다. 몸에 또 붉고 푸른 자욱들이 남는다 하더라도. 연준은 여전히 제 낯 즈음 머무르는 1205-26의 시선을 얼핏 의식하였으나 그 어떤 말도 않고 그저 옆자리를 떠났다.

연준이 국밥을 데워 늦은 점심을 먹을 때에 멤버들이 하나둘 해산하였다. 범규는 연습생 시절 친구를 만나러 간댔고, 태현은 간만에 누나를, 카이는 게임을 같이 하는 친구와 약속을 잡았댔다. 연준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에 숙소에는 나갈 채비 중인 카이뿐이었다. 그마저 연준에게 인사를 하고 떠나면 적막이 찾아온다. 소파에나 혼자 앉으면 일전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온기와 목소리, 옆에 실린 무게, 손바닥. …걔도 약속 있나. 대외적으로 최수빈은 다정하며 편견이 없고, 인간관계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 모든 게 프롬포트로 입력된 속성에 불과하더라도 1205-26은 앞으로도 원활히 사람과 소통하며 관계를 이어나갈 것이다. 오로지 최연준에게만 더는 과분한 노력을 쏟지 않아도 되는 것뿐이다. 효율을 그렇게나 따지는 로봇이니 당연지사의 판단이로다. 멍하니 번쩍이는 티브이 화면만 노려보다 저녁이 되어서야 관둔다. 눈치 볼 사람이 없으니 오늘은 조금 일찍 나갈까 싶었다. 커다란 백팩에 짐을 챙긴다. 눈에 띄지 않는 까만 옷을 전신에 두르고, 무거운 가방을 안일하게 왼어깨에 짊어졌다가 무지막지한 고통을 맞았다. 아아, 아. 쓰읍… 볼품없이 앓으며 문고리를 내렸던가, 서서히 소리가 줄어든다. 엘리베이터 앞 기다란 장신을 마주한다. 1205-26이 그곳에 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저기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방금 올라온 거겠지? 한동안 또 정적. 먼저 침묵을 헤살지은 것은 연준이다. 걸음을 내어 엘리베이터 앞에 선다. 내려가는 버튼을 누른 것과 동시에, 저음이 날카로이 박힌다.

"어디 가나요."

"그냥 뭐, 할 일이 있어서."

뭉뚱그린다. 사위가 고요해지면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기계장치의 소리만이 울린다. 연준의 시선은 디지털 숫자에 머무른다. 뒷자리의 동태만 내내 바라보노라면.

"밤마다 외출한다면서요. 카이에게 들었어요."

"아, 그래?"

"어디로 가는 건가요."

"……."

또 같은 질문. 연준이 하순을 우물거렸다. 역시나 대답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마침내 숫자가 멈추고, 금속의 문이 천천히 열려 그 속을 드러낸다. 익숙한 상황이었으나 두 사람의 관계는 달라졌다. 1205-26은 도무지 저와 눈을 맞추지 않는 연준의 옆모습을 요요히 바라본다. 저 머리통 안에 무엇을 꾀하고 있는지 1205-26은 알 수 없다. 10년을 그의 곁에 머무르고, 수십 번 그의 체액을 삼키고, 온기를 옮아가도 1205-26은 연준을 이루는 것 중 그 어떤 것도 훔칠 수 없었다. 최연준에 관한 수백수천 개의 데이터로도 1205-26은 연준을 다 분석해 내지 못하였다. 인간의 선택은 모두 호르몬의 영향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오로지 0과 1로 이루어진 명령에 의해 사고하며 행동할 뿐인 1205-26, 당초에 그 어떠한 선택조차 불가한 최수빈은. 손목을 붙잡았다. 억센 아귀에 연준의 몸체가 흔들렸다. 흘러내린 가방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면. 첨예하게 벼려낸 기색을 드러낸다.

"새 애인이라도 생겼나요."

"뭐?"

최수빈은 최연준에게 선택받았다. 그 누구라도 괜찮았을 최연준은 하필 최수빈을 선택하였다. 그게 어떤 원인과 이유에서였든. 데이터에 의한 명령을 처리하고 따를 뿐인 최수빈의 몸을 끌어안고. 그의 고리타분한 데이터 속 연인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것은 최연준이었다. 1205-26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최연준이 꺼져버리라면 1205-26은 꺼져야만 한다. 이별을 통보한다면 그의 이름을 쉽게 지워야만 했다. 1205-26은 오로지 인간의 명령을 따르는 로봇에 불과하므로. 그럼에 최수빈이 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것 뿐이었다. 1205-26은 붙든 연준의 손목을 끌어온다. 생채기가 곳곳에 자리한 손등. 1205-26은 그 수벽을 손수 펼쳐, 꾸욱. 손꿈치에 하관을 묻었다. 엄지로 그의 맥을 누르며. 형형한 안구로 연준과 눈을 맞추었다.

"당신의 연인이었잖아요, 나. 아무것도 변한 건 없어요."

"……."

"원한다면 당신이 죽을 때까지 만족시켜 줄 수 있어요. 인간과는 달리 지치지도 않을 것이고, 오로지 당신을 기분 좋게 만드는 것만을 목적 삼고 당신을 안을게요. 매일……."

안드로이드가 하는 구애. 1205-26이 연준에게 애원하였다. 자신을 도구로 써달라고. 그런데도 날 선 눈에 담긴 것은 분명한 소유욕이었다. 최연준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최수빈이 아니면 안 되었다. 최연준의 옆에는 최수빈이 있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한다고 모든 데이터가 1205-26에게 신호를 미친 듯이 박출해 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05-26의 핵심 기관은 고요하였다. 너무나 견고하여 웅웅대는 잡음조차 나지 않았다. 동계가 울릴 리 없었다. 1205-26은 심장을 가지지 않았으니. 연준의 마디가 움찔 굽었다. 1205-26은 기다렸다. 다시 한번 최연준이 저를 선택하여 주기를. 최연준의 몸속 옥시토신이 마구 분비되어 이성을 흐리고, 최연준이 아주 엉망이 되어 울기를, 그렇게 다시 제 목을 끌어안고 호르몬에 굴복하기만을…….

"그건 학습된 데이터에 불과한 거잖아."

잔인하게도 연준은 선고한다. 1205-26의 손에 힘이 빠진다. 그러나 연준은 자비 없이 1205-26에게 상기시킨다. "네가 내게 질투를 느끼고, 나를 걱정하는 그 모든 건 학습에 의해 만들어진 것뿐이잖아. 네 감정이 아니야. 넌 그러라고 명령을 받은 거고, 그 상황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것뿐이야. 그게 익숙하니까." 허물 없이 서로를 마주한다. "우린 단 한 번도 서로를 사랑한 적 없어."

"넌 나를 사랑하지 않아, 1205-26."

"……."

"나도 널 사랑하지 않고."

마침내 1205-26의 아귀에 완전히 힘이 풀린다. 스르륵 마른 팔목을 타고 떨어져 나간다. 1205-26은 데이터를 간직하는 로봇일 뿐이다. 1205-26은 연준을 안아본 적이 없으며, 그의 사랑을 받아본 적조차 없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할 리가 없다. 그런 기관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감정을 가질 수 없기에 1205-26은 완벽하므로. 연준이 완벽하게 옳았다. 마침내 인정한 1205-26의 손이 맥없이 허공으로 곤두박질치던 순간, 화악. 손등에 뜨거운 온기가 겹쳤다. 강렬한 감각 신호.

"…그래서, 나 네 도움이 필요해."

1205-26의 손을 쥔 연준이 성큼 바투 섰다. 단단히 고개를 치들고.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다. 1205-26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연인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 애가 남기고 간 마지막 단서가 바로 1205-26이었으므로.

"최수빈 어딨어?"

*

마음은 뇌가 만들어내는 것일까, 혹은 날 때부터 심장에 내재된 것일까. 어느 쪽이든 수빈은 마음을 가지지 못하였다. 수빈은 뇌도 심장도 없으므로. 수빈을 이루는 것은 겉껍질이 아닌 수만 개의 전기 신호와 기계 부품이다. 심장이 뛸 자리에 수빈은 제어 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에서 수빈은 사고하고, 학습한다.

16년산 안드로이드, 모델명 1205-16은 '안드로이드가 인간의 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는가'라는 도전을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주변 인간의 감정을 학습하고 모방하여 최종적으로 인간이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인공지능 모델을 완성하는 것. 연예계 산업에 투입한 것도 계획의 일부였다. 최대한 많은 유형의 인간과 접촉하고, 대화하며, 빠르게 데이터를 쌓기 위해. 다만 1205-16의 취약점은 분별력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선행 데이터가 전무하다 보니 전형적인 데이터만으로는 인간의 긍정/부정적 감정을 구분하기에 역부족이었다. 훗날 차세대 안드로이드의 인공지능이 그것을 완벽히 구분 하기 위한 표본을 수집해 오는 것이 1205-16의 기동 목적. 이를 위해 1205-16은 이분법적인 판단을 한다. 긍정의 인간과 부정의 인간을 나눈다. 한 그룹의 표본을 묶어 관찰하고, 반대쪽 그룹의 표본 역시 같은 식으로 처리한다. 분류는 쉽다. '최수빈'에게 호의적으로 구는 인간은 긍정. 무력이나 비속어를 사용해 오면 부정의 인간이었다.

"코브라샷!"

개중 최연준은 확신의 부정 쪽 인간이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허벅지를 콱 쪼고 도망가는 유치찬란한 짓을 행하고, 자주 굶고 잠을 자지 않는 등 생활 패턴은 엉망이며 자신의 기분에 따라 예민해지다 금방 풀리는 성정까지(허억…헉) 거를 타선이 없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수빈은 그 짓을 당할 때마다 아픈 척 오바를 떨어야만 했다. 그러면 연준은 꺄르르 웃으며 좋아했다. 데이터에 따르면 저런 인간을 악마, 싸이코패스, 심층으로 가서는 사디스트라고 인간들은 명하였다. 

최수빈에게 부정의 인간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관성 없는 데이터는 학습에 혼선만을 가져다줄 뿐이므로. '최수빈'의 인간관계를 긍정의 인간으로 구성하였다. 누가 보아도 성실하고 똑 부러지는 유형의 태현, 소심한 면이 있으나 타인을 배려하는 습관이 몸에 밴 카이. 그런 이들을 곁에 두며 수빈은 인간의 소통법을 차츰 학습한다. 부정의 인간은 자연히 '최수빈'의 인간관계에서 배제되었다. 다만 개중 여러모로 특출난 최연준은 인성뿐 아니라 눈치도 떨어진 탓에 수빈은 그를 떨쳐내려 부단한 노력을 해야만 했다. 툭툭 어깨를 건드려대는 장난에 부러 쳐다보지 않았고, 퉁명스레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지 못한 척하였으며, 이따금 어깨가 한없이 말려서는 남에게 기대어 있는 꼴을 볼 때면 이유를 알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수빈은 연준과 인위적인 거리를 두었다. 그럼에도 인간이 단편적이라는 명제가 틀렸음을 최수빈에게 처음 증명한 것 역시 최연준이었다. 웅크려 앉아 연준이 춤을 추고, 노래하는 것을 올려볼 때면 그는 무수한 별줄기처럼 유려하게 빛났다. 땀을 뚝뚝 흘리고, 가끔은 다리가 무너져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되서고. 남들 앞에서 평가받을 때에는 도리어 단단해진다. 노래하는 연준을 볼 때면 수빈은 그를 어떤 인간으로 정의해야 할지 혼란을 겪곤 하였다. 훗날 얌전한 줄로만 알았던 범규가 하루 만에 시끄러워졌을 때 크게 당황하지 않은 것도 그의 영향이리라.

"형 진짜 연준이 형이랑 안 맞네요."

"친하지도 않은데 맞고 안 맞고가 어딨어."

"그러니까는, 연습생들 다 친한데 형만 아직 안 친하잖아요. 이러다 같이 데뷔하게 되면 어떡할라고요."

글쎄. 가장 유력한 데뷔 후보가 최연준인 것도, 최수빈이 데뷔를 목표하는 것도 맞으나 그와 동료가 되는 미래는 전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저 그런 사이가 되지 않으려나. 어차피 최연준은 주변에 사람이 넘쳤다. 한시도 사람이 곁에 없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당초에 저에게도 초면에 팔 두르고 거리감 없이 전설의 "여기 1등 누구야" 시전하던 최연준인데. 최연준의 인생에 '최수빈'의 존재는 크지 않을 테다. 의식도 않고 지내다 가끔 눈에 보이면 시답지 않은 장난이나 걸어대는 정도일 게 뻔하지.

"그런 사이도 있는 거지."

"연준이 형은 형 좋아하던데. 짝사랑 힘들겠네요, 저 인간도."

"무슨……."

안드로이드의 삶에 들을 일 없던 단어가 들려와 드물게 기함하였으나 범규는 쌩 옆자리를 떠버린다. "연뚜니엉, 범뀨 영상 피드백 한 번만 해주떼욤." …나한텐 그런 거 안 부탁하더니! 목적지는 또 최연준. 최수빈은 정말로 최연준이란 인간을 알지 않으려 노력하는데 주변에서는 귀가 닳도록 최연준, 최연준 해대니. 정신 차려보면 또 최연준은 최수빈의 시야 안이다. 형용사가 모호한 거리를 유지한 채로.

월요일 아침. 수빈은 매달 첫째 주 월요일에 외출을 한다. 센터로 가 오류 점검을 받고, 배터리를 충전한다. "아무 문제 없네." 절차가 끝나면 다시 연습생 최수빈을 연기한다. 오후 1시. 대부분의 연습생들은 학교에 있을 시간. 수빈은 여타 다른 사람들과 같아 보이려 편의점의 에너지 음료를 사들고선 연습실로 향한다. 조그만 유리창 너머의 연습실은 불이 꺼져 있었으니 당연히 비었으리라 생각하고 문을 열었건만, 예상은 보란 듯 빗나간다. 거울 속 조그만 인영과 눈이 마주쳤다. 연준이었다. 아. 뒤늦게 탄식을 뱉었으나 연준이 더 빨랐다.

"뭐냐, 최수빈."

"……왜 여기 있어요? 학교는요?"

"병결 냈는데."

"어디 아파요?"

"아닝? 걍 빠지고 싶어서."

역시 부정의 인간다웠다. 병결이라는 시스템을 악용하는 것까지 꼭 그린 듯한 악인. "손에 그거 뭐냐? 와, 맛있는 거 사 왔네?" 방금까지도 연습 중이었는지 연준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수빈은 그가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나를 추론하느라 좁아지는 거리에 대응하지 못하였다. 확, 뻗어온 손이 허락도 없이 남의 비닐봉지를 헤집는다. "와, 씨. 몬스터 이거 내가 좋아하는 맛인데." 역시 제멋대로에 매너도 양심도 없다. 이런 인간을 상대로 하는 입씨름은 시간 낭비일 거라 판단한 수빈은 몬스터를 얌전히 내어주었다. 연준은 좋다고 웃는다. 그러더니 돌연 손목을 모로 쥐고, "이리 와, 거기 서 있으면 밖에서 보여." …보이면 뭐 어떻다고? 황당한 제의에도 수빈은 저항 없이 이끌렸다.

연습실 벽에 등을 기대어 나란히 앉는다. 수빈은 커다란 거울 속 저와 연준을 바라본다. 제법 가까운 거리. 입술이 달싹여졌다. 그와 단둘이서 하는 대화가 낯설었다. 최연준 같은 인물을 대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 데이터는 어디에도 없었으니. 차칵, 알루미늄 캔을 따는 청량한 소리가 울린다. 목 넘김이 잇따라 귀를 간질였다.

"너 자퇴했댔지."

"…어떻게 알아요?"

"모르겠냐? 이곳저곳에서 다 들리는데. 너 애들이랑 친하잖아."

달리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무니 연준은 꼭 안은 무릎에 머리를 대었다. 하이얀 뺨이 단단한 슬개에 밀려 뭉개어진다. 수빈은 저도 모르게 그즈음 시선을 머물렀다가, 이내 눈접어 웃는 얄구진 얼굴을 마주하고야 말았다. "학교 안 나가면 늦게 자도 되는 거 아냐?" 무슨 유치한 얘기를 하려나 했더니.

"그럼 앞으로 새벽 연습 자주 나와, 나 혼자 심심해."

"형은 안 자요?"

"엉, 어차피 학교에서 자니깐. 근데 다른 애들은 새벽 연습 잘 안 한단 말야."

그런데 학교에 나가지 않은 오늘마저도 쉬지 않고 연습을 나온 연준. 수빈은 땀기운이 스며 투명해진 연준의 흰 티를 흘겨보았다가, 금박이라도 당한 양 다시 그 얼굴로 돌아왔다. 답지 않게 대답을 길게 고민하니 난데없이 연준이 한숨을 뱉어낸다. "됐어, 안 와줄 거 뻔해." 왜? 수빈은 잠을 잘 필요도 없는데. 연준이 알 겨를은 없겠으나 그와 새벽 연습을 하기에 가장 부합한 조건을 가진 것은 로봇 최수빈이었다. 다만 대상이 하필 연준인 것이 문제. 정형적인 대답이라도 내놓으려 입술을 달싹였으나.

"너 나 싫어하잖아."

꼭 오늘의 날씨를 얘기하듯 평탄한 목소리. 수빈은 그대로 굳는다. 정작 발언자는 태연하기 짝이 없게 음료수나 또 벌컥 들이켰다. 수빈은 그의 손에서 구겨지는 알루미늄을 멍하니 올려다본다. 버퍼링이 걸린다. 오해다. 최수빈은 최연준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저 효율을 위해 필요하지 않은 데이터로 판단하였을 뿐, 수빈의 개인적인 판단이나 감정은 섞여 있지 않다. 수빈은 감정을 가지지 않는 로봇이니. "아니에요." 긴긴 로딩 끝에 뱉은 것은 한치 왜곡도 없는 진실이었다. 그러나 연준은 이미 무릎을 짚고 일어선다. "됐어, 인마. 속일 걸 속여야지." 수빈은 어쩐지 다급해진다. 충동처럼 곁을 지나려는 손등을 붙든다.

"싫어한 적 없어요."

"……진짜로?"

"네, 정말로요. 맹세해요."

무엇도 걸 수 없는 주제에 맹세를 하였다. 그 순간은 연준을 달래야 한다고 판단하였기에.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믿지 못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증명해 내야 하는가? 스스로 불러온 재앙과 같았다. 온 힘을 다해 그를 피해 온 탓에 수빈은 연준을 다루는 법을 전혀 알지 못했으니. 붙든 손아귀에서 연준이 손을 내빼자 더욱 출력이 높아진다. 어떻게 해야 하지. 부정의 인간을 달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에게 신뢰를 얻으려면… 턱. 그 손바닥이 그대로 제 머리통에 얹히자 수빈의 사고 기관이 뚝 멈추었다. 세심함이 결여된 손이 수빈의 머리칼을 마구마구 헤집는다. 별안간 까치집이 된 수빈은 석 나간 얼굴을 한다.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샐쭉 웃고 있는 최연준.

"그랬구나아, 우리 쑤비니가 형이 막 좋아서 죽을 것 같았구나. 엉?"

"아니, 그렇게까지는 말 안 했는…"

"난 네가 나 피하는 줄 알았지."

움찔. 이번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유가 어쨌건 최수빈은 최연준을 피해 왔다. 연준의 손짓은 서서히 느려진다. 보드라이 앞머리를 넘기며 헝크는 손을 수빈은 떼어내지 못하였다. "내가 부르는 것도 일부러 무시하는 것 같고. 나한테만 쌀쌀맞게 구는 것 같고…, 그래서 형은 너한테 서운했단 말야." 연준이 그걸 다 알고 있었다는 게 수빈의 회로를 비비 꼬이게 만들었다. 변명을 찾는 대신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눈치 없이 자꾸만 장난을 걸고, 이름을 불러대던 최연준. 수빈이 저를 피한다는 걸 다 아는데도 그래왔다는 것이었다. 왜? 주변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최연준은 왜 고작 최수빈이 자길 피한다는 걸로 서운했을까. 왜 최수빈에게 말을 걸며 관계를 개선해 보려 노력했던 걸까.

"난 너 좋아하는데, 넌 아닌 것 같아서."

어쩌면 수빈이 너무 섣부른 판단을 하였을까, 연준은 곁에 두어 마땅한 긍정의 인간인가. 그래서.

"아니에요, 좋아해요, 저도."

"진짜?"

"네."

"나 바나나우유 먹고 싶어."

"……네?"

갑작스런 주제 변경. 연준은 꼭 순진무구한 사람처럼 눈을 끔뻑이다 다시 한번 말하였다. "바나나우유 먹고 싶다니깐." ……어쩌라는 거지?? 그때 문이 열렸다. 연준보다도 나이가 많은 연습생. "뭐야. 여기서 뭐 하냐, 연준아?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네에, 형 하고 발랄하게 대답한 연준은 쏠랑 가버린다. 덩그러니 남겨진 수빈은 혼돈의 카오스에 휩싸인다. 신경망 속에서 불꽃 써치 시작. 연습생 기간 동안 쌓아온 데이터를 쭈욱 훑어 유사한 사례를 찾아본다. '여친이 나더러 마카롱 맛있겠다더라, 이거 사 오라고 시키는 거지?', '형들이 목마르다고 했으면 음료수를 사 와야 할 거 아냐, 씨!' 아…… 셔틀……? 결론에 도달한 수빈은 폐목 하였다. 과연 최연준은 긍정의 인간이 맞는가……. 안타깝게도 수빈은 결국 또 한 번 편의점으로 향했고, 투플원인 탓에 바나나 우유를 세 개나 사와 연준의 락커에 넣는 개호구 행동을 하게 되었다. 비효율적이기 짝이 없는 짓.

"요새 새벽에 열심히 나오네요?"

로봇 팔자에 있을 리 없던 새벽 연습을 시작한 것도 연준의 탓이었다. 분명 새벽 연습 하는 사람이 저 혼자라며, 심심하다던 연준의 말과 달리 새벽에도 연습실에는 대여섯 명 되는 인원이 있었다……. 게다가 최연준은 일주일째 저어 먼 무리에 껴서는 이쪽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노력은 개뿔! 아직 인간의 거짓말을 구분해 내는 능력에 서투른 수빈은 보란 듯 속아버리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새벽에 나오기로 약속했다고 꼬박꼬박 나오는 미련한 로봇. 어쩐지 목이 홧홧하여 벌컥 물을 들이키는 시늉만 했던가.

"다들 간절하긴 한가 봐요, 이 시간에도 사람이 많네."

"어?"

"이번 월말평가 끝나고 데뷔조 발표한댔잖아요. 형도 그래서 나오는 거죠?" 

"……당~근이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했다. 차마 최연준 때문이라고는 말이 안 나오더라. "이렇게 마음 졸이는 것도 며칠 안 남았네요." …그러게. 이상하게 확신이 들지 않는다. '최수빈'은 딱 데뷔조에 들 정도의 성장을 보여줘 왔다. 철저하게 프로그래밍 된 것이며, 혹여 오차가 발생하여 데뷔조에 드는 것에 실패하여도. 그는 로봇에 불과하므로 간절할 것도 없다. 그냥 거기서 '최수빈'의 데이터 수집 임무는 끝일 뿐이다. 그런데도.

"연준이 형은 무조건 데뷔겠죠?"

"……으응."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데뷔조에 들지 못하면 최연준을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아니고 하필 최연준. 데뷔를 마친 최연준의 곁에 있을 인물들을 하나씩 그려내 본다. 긍정의 분류에 든 인물들로 하나씩 채워 넣었으나 영 완성도가 떨어진다. 수정, 또 수정. 종국에는 어떠한 이미지도 완성하지 못하고 처음으로 돌아간다.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면. 더는 연준을 분석할 길이 없을 테다. 여우 같이 웃던 얼굴도, 그날 했던 말 중 무엇이 진심이었는지도, 왜 새벽 연습을 나오라고 했는지도. 수빈은 연준을 지나치게 신경 썼다. 지나치게 이름을 자주 들었다. 지나치게 고뇌하였다. 피곤해 보이는 수빈에 태현이 화제를 바꾼다.

"그래도 슬슬 들어가죠, 벌써 새벽이네요."

"아, 난 조금만 있다가."

"그래요, 그럼. 저 먼저 갈게요."

태현을 배웅한 수빈은 그제야 시계를 흘끔 본다. 오전 세 시. 어째서 머무른다는 선택을 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요즈음은 비효율의 연속이다. 지독한 오류라도 걸린 걸까, 센터에 보고해야 하나……. 벽에 기대어 선 눈을 붙였다. 저도 모르게 청각 센서를 증폭하며. "…리도 슬슬 들어가자," "…준이는 어떡할 거야?", "……." 떠나는 여럿의 발소리. 이내 완전히 고요해진다. 뭘 기다리며 이곳에 남았는가. 새벽까지 남아 연습한다는 대외적인 이미지? 남들만큼 데뷔가 간절하다는 증빙?

"최수빈."

번쩍 눈을 떴다. 빠르게 뒷등을 외틀고, 커진 동공으로 발생지를 바라보면. 연준이 떠나지 않고 그곳에 있었다. 땀에 젖은 앞머리, 발갛게 열 오른 뺨, 반팔 티셔츠 아래 깡마른 팔. 멈춰버린 수빈에게 연준은 손을 내민다. "밤새울 거면 같이 바람 쐬고 오자." 수빈은 강한 명령을 들은 것처럼 일어나 곧장 그를 쥐었다. 맞닿은 손바닥의 온기가 뜨거웠다. 전신을 이루는 인조 상피가 죄 녹을 듯이.

새벽의 밤공기는 아무리 여름이라도 서늘하였다. 체감 섭씨 이십 도. 편의점에서 에너지 음료나 사서는 돌아갈 줄 알았던 연준은 기행을 펼쳤다. 사옥 바로 앞 지에스를 지나치고선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5분 정도 말없이 걸으며 목적지를 추론하던 수빈은 연준이 세 개의 각기 다른 편의점 브랜드를 지나칠 때야 물었다. "우리 어디 가요?" 연준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하였다. "한강." 진짜, 헛소리. 걸어서 30분이 걸리는데 이 새벽에? 이번에도 농담이겠거니 예상했으나 연준은 정말로 계속하여 걸었다. 십오 분, 가로수길의 절반을 지날 때야 그게 진담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수빈은 또 연준을 예상하는 것에 실패하였다. 대화는 거의 없었다. 그저 맞댄 수벽만으로 서로의 존재를 증빙하였다. 기어이 물가에 도착한 연준은 수빈에게 바나나우유를 사주었다. 투 플러스 원. 그렇게 좋아한다더니 수빈의 손에 두 개나 쥐여주고선 잔디밭에 주저앉았다. 평소답지 않은 고요함. 수빈은 그 옆에 앉으며 제 겉옷을 그의 마른 어깨에 둘러주었다. 수빈은 인간과 달리 추위를 느끼지 않았으니. 반면에 연준은 아무리 유별나 봤자 툭 하면 병에 걸리고 마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겉옷을 만지작대던 연준이 웃었다. 거절하지 않았다.

 늘어진 마천루의 빛이 강물에 반사되어 일렁인다. 연준은 말없이 그것을 건너다보고만 있다. 수빈은 또 한 번 청각에 귀를 기울인다. 어딘가의 말소리, 풀벌레가 우는 소리, 잔잔한 물결 소리, 그 사이에 연준의 엷은 숨결이 섞여 들린다. 마침내 입술이 떨어지고. 평소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수빈. 넌 네가 데뷔할 것 같아?"

무어라 대답해야 하지. 확률에 기반한 대답을 해야 하는가? 혹은 겸손을 떨어야 하는가? 망설임. "수빈아." 잔디밭 위 아무렇게나 두었던 손 위로 온기가 닿아왔다. 연준의 소지가 제 같은 마디에 걸려 있었다. 아주 미약한 힘이었는데도 그것은 수빈에게 불가항력으로 작용하였다. 실없이 겹친 손을 내려다보다 뺨을 들었다. 저 홍채에 제가 담겨 있다는 것이 새삼 묘하다. 속이 또 웅웅.

"우리 서로 비밀 하나씩 말해 주자."

연준의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린다. 하얀 뺨이 차 보였다.

"나 지금까지 전부 잘하는 척해왔는데… 실은 다 못한다?"

그 순간에는 모든 게 멎어버린 것 같았다. 그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춤도, 노래도 다 1등이라고 자랑해 대고 다녔는데. 사실 뭐 하나 확신이 없어. 전 회사에 있을 때는 춤 말고는 칭찬 들어본 적 없고, 1등도 해본 적 없는데……. 여기 왔더니 갑자기 나더러 1등이라는 거야, 그래서. 전부 잘하는 척해야 할 것 같았어." 그토록 제멋대로고, 세상 무서울 것 하나 없어 보였던 최연준이 제 연약함을 고백하는 순간.

"무서워, 데뷔 못할까 봐."

"……."

"데뷔한다고 쳐도. 사람들이 날 좋아해 줄까. 지금도 이렇게 확신이 없어서 거짓말만 하면서 살아가는데. 금방 들켜버릴 것 같아서."

수빈은 얽힌 소지에 힘을 주었다. 망설이지 않았다.

"다들 형을 사랑할 거예요."

"……."

"사랑스러운 사람이니까요, 형은."

진심이 가닿았을까. 그렇지 않았대도 수빈은 몇 번이고 더 말해줄 수 있었다. 맹세컨대 한 치의 거짓도 섞이지 않았으니. 동여맨 손가락이 꼼실. 연준이 작게 중얼거렸다. "너도 비밀 하나 말해주라." 비밀. 수빈은 연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연약함을 못 본 척하고 싶지 않았다. 두 소지를 걸고 약속했으니. "…저요." 수빈은 입을 떼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던 제 비밀을 내어준다.

"사실 로봇이에요, 저."

충동과도 같은 판단. 뒤늦게 반동을 떠올린다. 어떻게 받아들일까. 믿지 않으려나. 저도 모르게 활성화된 분비샘에 고인 타액을 꼴깍 삼켰다. 천천히, 연준은 뺨을 든다. 다시 눈이 마주치면 수빈은 그 속에서 명멸하는 항성을 보았다. 그의 안은 반짝이는 빛을 품고 있었다. 꼭 최수빈처럼. "그렇구나." 그러고선 배시시. 접히는 눈꼬리에 수빈은 몸체에 이물질이 들어간 듯한 간질거림을 느낀다. 그게 전부였다. 수빈이 연준의 역린을 보듬어주었듯, 연준도 수빈의 약점을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그저 오래도록 소지를 엮은 채 두 사람은 여름밤을 보내었다. 문득 연준이 피로를 느낄까 걱정되어 "안 들어가도 괜찮아요?" 물으니, 연준은 얽은 손에 힘을 주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더 있자. 하루쯤은 괜찮잖아." …하루쯤은. 입을 다문 것과 달리 핵심 기관은 시끄러이 발광하고 있었다.

연준과 헤어진 후에도 수빈은 내내 그를 떠올렸다. 그의 약점을 다 알게 되었는데도 수빈은 연준이 여전히 쉽지 않았다. 이제는 최연준을 명확하게 정의할 만도 하였는데 영 그럴 수 없었다. 왜일까, 조금 더 최연준과 밤을 보내고 나면 알 수 있을까. 손바닥에 머물렀던 온기를 가늠하며 연습실로 들어섰다. 월말평가를 일주일 앞둔지라 사람이 바글거렸다. 수빈은 습관적으로 연준을 찾는다. 마침 눈이 마주치자 수빈은 망설이지 않고 그에게 다가가려 하였다. 패기롭게 내디딘 발걸음을 저지 당한 것은 오롯 상박을 붙든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 아? 뒤돌아 심각한 표정의 범규를 마주하길.

"형, 실망이에요."

"어?"

"어떻게 우리한테 정체를 속일 수 있나요."

그대로 굳었다. 정적. 동공의 조리개가 좁아졌다 풀어지길 반복하였다. 어떻게 알았지? 어째서 들통난 거지. 완벽했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어제 연준에게 제 비밀을 토로하였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나 연준이 떠벌렸을 리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랬는데. 터억, 이번엔 어깨에 팔이 걸렸다. 수빈의 머리통 바로 옆, 어두운 낯의 연준이 중얼. "그래……, 내가 어제 똑똑히 들었어."

"최수빈이 지가 로봇이래."

"……."

"로봇… 로봇, 그러니까, 건담 같은 거지. 트랜스포머처럼 막 지잉—하면, 범블비로 변하고, 크흡…, 으하하학!!"

그리고 연준은 개쪼개기 시작하는 것이다……. 붕방 뛰며 동네방네. "야, 우리 쑤비니 터미네이터니깐 다들 깝치지 마라, 크읍, 푸하학!" 범규까지 합세하여 놀리기 시작하였다. "형 빨랑 변신해 봐요, 아님 뭐, 로봇청소기?"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다음날 점검을 위해 센터에 들른 수빈은 갱신된 데이터가 있냐는 연구원의 질문에 대답하였다. 인간이란날때부터사악한존재이며이중적이기짝이없고사람을쉽게배신하곤하는간악한생명체라고……. 

인간에게 배신 당한 가여운 로봇은 지독한 인간불신에 빠지고 만다. 또 다시 연준을 쌩무시하기 시작하였다. 야아, 최수비인. 하고 늘어지는 목소리로 불러대어도, 툭툭 팔꿈치로 쑤셔대며 무시하냥?? 따위의 발음으로 수빈의 속을 쏘삭여도. 새벽 연습도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눈앞에서 연준을 치워버렸는데도 수빈은 도저히 그날의 수모가 잊히지 않아 최연준이란 이름에 온갖 부정적인 표준어를 다 달아대었다. 부글부글. 마침내 찾아온 월말평가날. 긴장한 연습생들이 삑사리를 내고, 가사 실수를 한다. 누군가는 울며 뛰쳐나가기까지 하였다. 초상집 분위기 속 딱 계획한 수준의 무대를 선보인 수빈은 긴긴 기다림 끝에 연준의 차례를 감상한다. 실은 무섭다며, 짐짓 강한 척해왔다던 연준은 완벽한 무대를 해내었다. 수빈은 분석을 목적으로 뚫릴 듯 그를 노려보며 모든 요소를 눈에 담았다.

월말평가가 끝나자 신개팀에서 30분 뒤 데뷔조를 호명하겠다고 하였다. 모두가 다리를 덜덜 떨며 초조하게 발표를 기다렸다. 개중 앞선 무대를 망친 연습생들은 벌써 울고들 있었다. 수빈은 그 사이에서 또 누군가를 찾는다. 남에게 잔뜩 둘러싸인 이를 제 두 눈으로 보고서야 물을 가져오겠다는 핑계로 연습실을 나왔다. 가장 먼 자판기를 찾아 열을 식힐 때.

"최수빈."

수빈은 하순을 짓씹는다. 명백히 저를 부르는 소리를 무시한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을 알 수 있었기에. 따라오는 발걸음이 밭아진다. "최수비인… 너 진짜 형 무시할 거냐? 엉?" 대꾸하지 않으며 수빈은 속도를 박찬다. "흐아, 야, 좀만, 천천히이……." 격차를 벌어내려 하였는데. 연준은 달음질을 쳐 기어이 수빈의 옷소매를 붙들었다.

"너 삐쳤냐?"

질문에 발열이 훅 올랐다. 주먹을 쥔 수빈이 거칠게 뒤돌았다. 코앞에 연준이 있었으나 수빈은 더는 저 페이스에 속지 않는다. 부득 저도 모르게 이가 갈렸다.

"그럼 화가 안 났겠어요? 기껏 비밀 털어놓았더니……!"

"뭔 비밀? 아, 설마 건담?"

할 말이 수천수백 개가 동시에 들어 과부하가 왔다……. 그 모든 걸 함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수빈은 주먹만 떨었다. 와중에 저쪽에선 야살스레 발코를 콕콕. 장난하나? "아니이, 난 진짜 비밀 털어놨는데 네가 뭔, 갑자기 이상한 농담을 하잖아. 나도 서운했거든? 엉?" 농담! 수빈이 연준을 위해 그간 얼마나 비효율적인 판단을 감행해 왔는지 알면 절대 저런 소린 못 할 테로다. 의미 없는 대화를 종결시키려니 연준이 이번엔 손을 붙잡는다. "아아, 알았어, 사과의 의미로 선물 줄게." 선물? 보나 마나 또 바나나우유 같은 것일 테니. 수빈의 시선이 그의 옷주머니로 향하였다. 그러나 바나나 우유의 윤곽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연준의 손가락이 제 접힌 손안으로 파고든다. 손바닥을 살금살금 스치는 감촉. 무언가를 넘겨주려는 것인가? 저도 모르게 손을 펼쳤던가. 틈새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깍지, 깍지라고들 부르는 행위였다.

그리고, 쪽.

"……."

뺨에 닿았다. 짧고 투박한 감촉이. 입맞춤을 받았다. 최연준에게. 수빈은 그대로 뚝 가동을 멈추어버린다. 고장이 나버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 짧게 닿았다 뗀 연준은 몸을 물리지 않았다. 수빈이 할 수 있는 것은 기계적으로 눈앞의 상황을 읽는 것뿐이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축 늘어진 눈썹, 매번 얄궂게 물결치던 눈매가 풀어지고.

"아직 화 안 풀렸어어?"

"……."

"…이거 아니야?"

수빈은 여전히 그 어떠한 언행도 출력해 내지 못하였다. 적당한 반응을 해내기 위해 회로가 미친 듯이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속의 온도가 찜통처럼 죽죽 오르고 기계 소음이 철면피 아래 시끄러이 울렸다. 입맞춤? 그에게 연애 기능 따위는 탑재되어 있지 않다. 프로세서에는 "아이돌은 이성 교제를 하지 않는다"라는 명령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그런데 최연준이 키스(과장)를 해왔다. 이성이 아닌 최연준이.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성에게 끌리지 않는가? 이따금 그렇지 않은 비주류의 인간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최연준은 너무나 주류의 인간이었다. 매뉴얼을 아무리 뒤져봐도 전래가 없는 상황. 그 어떠한 데이터에도 의존할 수 없었다. 지금 해야 할 것은 유연한 프리스타일. 그리고 이 로봇은 그것에 젬병이었도다. 가장 빌어먹을 것은, 수빈이 열심히 사고 엔진을 돌리는 동안에도 시간은 째깍째깍 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스륵, 연준의 손에 힘이 풀렸다. 그제야 수빈의 동공이 도로 좁아지며 헛숨을 들이마셨다.

"싫구나?"

"네?"

"됐다, 그냥 잊어."

잡는 건 그토록 공들인 주제에 놓아버리는 것은 순식간. 제 손아귀서 빠져나가선 홱 뒤도는 연준을 수빈은 급히 붙들었다. "잠깐만요." 아직도 마땅한 답을 찾아내지 못하였는데. 몸이 먼저 나갔다. 성급하고 말았다. 다급하게 손목을 붙들었으나 연준은 힘없이 팔꿈치를 휘두를 뿐이다.

"됐어, 싫은 거잖아. 잊어버려, 명령이야."

명령. 눈살을 구겼다. 수빈은 인간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러나 시스템이 거부하였다. 죽어도 따르지 않으리라 판단하고선 다시는 재고하지 않았다. 명령 거부를 수행할 때에 입은 제멋대로 나불거렸다. "잠깐 버퍼링 걸린 거예요, 싫은 게 아니라." 그야말로 회로를 거치지 않은 발언. 버퍼링이라니! 연구원들이 이것을 들었다면 기절초풍했으리. 로봇인 걸 광고하기라도 하는 것인가? 섣부른 대처였으며, 글러 먹은 단어 선택이었는데.

"그러면?"

"……."

"어떤데, 넌."

연애 시스템 따위는 구축되어 있지도 않고, 앞으로도 없을 최수빈. 더는 잘못된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 잘못된 기로에 들었다가는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 효율적이게 행동해야만 한다. 한낱 로봇에 불과한 수빈은 절대 할 수 없을 것이다. 동성과의 연애, 인간의 애정을 감당하는 일, 최연준의 하나뿐인 연인이 되는 것. 최연준의…. 수빈은 이번에도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연준의 손을 제 허리 너머로 당겨 두 입술을 맞물렸다. 명확히 잘못된 판단이었다. 행동을 무르는 대신 목을 끌어안아 오는 연준의 뒤통수를 받치고, 그의 호흡에 맞춰 숨을 조절하였다. 파직, 내부에 정전기가 튀어 수빈의 안검이 움찔거렸다. 코앞의 연준은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입맞춤을 할 때는 눈을 감아야 하는구나. 수빈은 그것을 학습하며 입을 열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각이 몰아쳐 데이터를 처리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다. 마침내 연준이 고개를 내빼었을 때 수빈의 호흡은 엉켜 있었다. 입을 다물 줄도 모르고 벌리고 있다가, 다시 입술을 붙이려 하였다. 그 사이를 틀어막는 것은 연준의 손이었다. 마땅한 저지에도 수빈은 앞만 보이는 것마냥 강행하려 그 손목을 내다 잡았다. 이토록 회로가 꼬이고 엉켰는데, 연준은 엉망인 그의 꼴을 키득이며 비웃었다. "안 돼, 그만." 초조해진다. 왜? 뭔가 잘못했나, 마음에 들지 않았나. 사전 학습 없이 해버린 게 패착이었다.

"왜요……, 왜 안 돼요, 저 잘할 수 있어요. 못했다는 거 아는데요. 한 번만 더 하면 정말 잘할게요, 원하는 게 있다면 다 배워올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명령을,"

"방금도 엄청 좋았는뎅."

"……."

"30분 다 됐어."

개구장진 소태를 머금은 연준이 수빈의 머리칼을 마구 헝클였다. 입술만을 노려보던 시야가 그제서 선명해진다. 주변시가 개어서야 보이는 것들. 새빨개진 연준의 귓전, 뜨거운 목덜미, 그리고 쿵쿵, 시끄러운 가슴 동계. 수빈이 얼빠져 있을 때 연준은 품을 쏙 빠져나갔다. 냅다 반대쪽으로 뛰고서는, 홱.

"데뷔조에 너랑 내 이름 같이 불리면."

"……."

"그럼 또 해줄 테니까 마음 졸이고 있어?"

코너를 돈 연준의 모습이 사라지면 우두커니 선 수빈의 시스템은 비로소 안정의 상태로 돌아온다. 연준과 입을 맞추었다는 현실이 들이닥친다. 실수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데뷔하지 못하면 없었던 일이 된다. 최연준과도 영영 안녕이고, 최수빈으로서의 임무도 끝나니. 그래, 데뷔조에 내 이름이 없으면 다 해결되겠네. 최연준의 키스를 다시 받을 일도 없을 테고. 그렇게 결론지은 수빈은 연습실로 돌아간다. 인파 사이를 가르고 벽 쪽으로 돌아가서는 다리를 떨었다. 부산스럽게 굴었다. 호명되는 이름에 최수빈이라는 석 자가 없을까 봐, 그와 함께 데뷔하지 못할까 봐. 한낱 인간처럼 초조하고 불안해하며 수천 가지의 경우의 수를 만들어냈던가.

마침내 데뷔조에 최연준과 최수빈의 이름이 나란히 불리는 순간. 수빈은 정말이지 연준과 입을 맞출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수빈의 미흡한 대처로 인해 최연준의 연인이 된 최수빈은 배로 바빠졌다. 그룹에 신경 쏟으랴, 데이터 수집하랴, 틈틈이 애인 놀아주라. 바쁘다 바빠 로봇 사회! 안타깝게도 최연준은 호기심이 넘쳤고, 몸 쓰는 걸 더럽게 좋아하셨다. 우리 이거 해보자, 저거 해보자. 수빈은 연인이라는 책임감에 그의 호기심을 모두 충족시켜 주었다. 응당 감당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하였다. 매일 사랑을 속삭이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 수빈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므로 성립되지 않는 이야기였으나, 인간의 사랑을 모방하는 것은 할 수 있었다. 순조로웠다. 연준에게 저만큼 편리한 연인은 없으리라 수빈은 자신하였다. 착각은 금방 깨어졌다.

 연준은 데뷔 이후에도 자주 끼니를 거르고, 잠을 자지 않았다. 수빈이 그것을 걱정할 때면 연준은 모진 말을 뱉었다. 내가 알아서 해, 네가 왜 참견질이야? 그 소릴 세 번째 들었을 때에 수빈은 연준에게 처음으로 대들었다. 내가 형 애인이니까요. 사실을 말하였고, 연준은 그것에 불같이 화를 내었다. 의견이 좁혀지지 않고 팽팽하게 싸웠다. 끔찍하게도 '최수빈'은 최연준과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기에. 그렇게 다시는 얼굴도 보지 않을 수준으로 말씨름을 한 날 수빈은 연준과 끝났다고 생각하였다. 최연준은 나름의 고집과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었으니. 그런데 그 모든 예상을 박살내고 연준은 그날 밤 수빈을 찾아왔다. 방문을 두드리고선 말없이 안겼다. 그때 수빈의 회로는 또 한 번 고장 났다. 갱신에 갱신. 연준의 나신을 처음 안아본 날에서야 수빈은 깨달았다. 텍스트로 쓰인 상식은 입체적인 연준에게 대입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고작 하나 더 알게 되었다. 머리통에서 스파크가 튀고, 기계 심장은 미친 듯이 발열을 일으켰다.

언젠가는 대판 싸워 서로를 쳐다도 보지 않고. 또 언젠가는 질릴 만큼 종일 붙어먹었다. 수빈이야 감정을 느끼지 못하지만 연준은 한낱 인간에 불과하였다. 그 정도로 큰 감정 기복을 느끼면서도 연준은 수빈을 놓지 않았다. 수빈은 연준이 가여웠다. 인간도 아닌 로봇과 연애하는 최연준이. 조금 더 사랑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걸 안다. 언젠가 그에게 말하였듯 연준은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사람이니. 그러니 언젠가 연준이 끝을 고하는 순간에 수빈은 기쁘게 그를 보내주려 하였다. 먼 훗날 나이를 먹어 은퇴한 최연준이 자신보다 키가 작은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면 진심으로 축하해주리라 생각하였다. 최연준이 최수빈을 버리는 순간에.

"와, 나 요새 체력 떨어진 게 느껴진다?"

그렇게 미룬 세월이 무려 10년을 넘겼을 때도. 고등학생에 불과하였던 최연준은 어느새 스물 후반이 되었다. 깨는 말을 뇌까리는 것 하난 변하지 않았지만. 핀잔 대신 수빈은 땀에 젖은 연인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긴다. 연준은 키득 웃는다. 웃는 모양새 역시 그대로. "최수빈. 넌 은퇴하면 뭐할 거냐?" 문득.

"……아직 멀었잖아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지."

"뭐 그런 불길한 소릴 다."

"아, 빨리. 생각해 본 적 없어?"

서른이면 대부분의 인간들은 결혼을 한다. 최연준은 아이돌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으니 조금 더 뒤일지 몰라도 슬슬. 연준도 동성 멤버와의 장난질 같은 유치한 연애는 끝낼 때가 됐는지 모르겠다. "…모르겠는데요."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때면 최수빈의 임무는 정말 끝났을 테니까. 그때가 온다면. 수빈은 더는 '최수빈'의 형태로 남지 못할 것이다. 그때면 정말 당신과도 안녕이겠지. 다시는 내 두 눈에 직접 당신을 담을 수 없고, 두 손으로 당신을 쓰다듬지 못하겠지. 당신의 이름을 부르지 못할 테고 영영 데이터 속의 당신만을 되뇌겠지. 최수빈은 최연준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낳을 자식이 누구를 닮았는지도 보지 못할 것이다. 제게는 오지 않을 미래라는 것을 다 아는 탓에. 남의 망상이라도 빌려 하였다. "……형은요? 뭐 하고 있을 것 같은데요." 으음. 고민하는 듯한 조그만 소리.

"몰라. 숙소 나와서 살겠지? 적당히 넓은 집 하나 구하고. 애들이랑도 자주 봐야지. 달에 한 번씩은 다 같이 보자."

"그래요."

"여행도 다닐래, 죽기 전에 세계 일주 끝내야지."

죽기 전에. 수빈은 조용히 연준의 어깨를 쓰다듬는다.

"오래오래 살아야죠."

"응, 너도."

입안에 쓴맛이 감도는 착각이 든다. 수빈은 숨을 한 번 삼키고 연준의 뺨으로 손을 옮겼다. 뜨거운 온도. 엄지로 눈가를 문지르니 편안하게 눈을 감아온다. 수빈은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리며 허탈하게 물었다. 그때 내가 존재한다면 당신 전 남자친구일 텐데.

"저랑도 자주 만나주려고요?"

"매일 보겠지, 우린."

"……."

"같이 살아야지."

그만 호흡을 잊었다. 숨이 턱 막히는 감각. 폐 따위의 그럴싸한 기관도 존재하지 않으면서. 연준은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둘이서 살기 적당한 집에서 매일 늦잠 자자." 최연준이 그린 미래에는 결혼이 없고. "세계 여행 다니면서 맛있는 것도 잔뜩 먹어보고." 아이도 없고, 사랑스러운 여자도 없다. 그 대신. "매일 속삭이는 거야."

"사랑해, 최수빈."

"……."

"사랑해, 수빈아. 최수빈……."

낡은 고철 로봇만이 여전히 옆에 있었다. 별 볼 일 없는 초라한 미래를 중얼거리며 연준은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환기가 되지 않았다. 지독한 열락이 오른다. 일렁이는 시야 속에 수빈의 회로는 그 어떠한 윤색 없이 연준의 언어를 받아들인다. 사랑한다. 최연준이, 최수빈을.

수빈은 이제는 안다. 인간은 결코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는 생물이라는 것을. 0과 1로 이루어진 저와 달리 연준은 오색찬란하였으며 뜨겁고, 아주 복잡하였다. 수억 가지의 요소가 알알이 얽혀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어 일제히 작동한다. 병에 걸리면 몸체를 바꿀 수도 없으며, 죽어버리면 모든 기억이 사라져 버린다. 이리도 거대한 연준은 늙으면 허리가 굽는다. 서서히 땅을 향해 고개를 떨구다, 죽으면 끝끝내 썩어 천천히 분해된다. 결국에는 대지에 흡수되어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연준은 꿈을 꾼다. 한평생을 살아가며 악착 같이 노력하고, 울고 웃는다. 그 누구도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스스로 목표를 끊임없이 생성해 내고, 그것을 좇아 나아간다. 그것이 인간의 존재였으며 최연준이었다. 부정과 긍정을 모두 가진 불가분의 생명체. 그런 최연준이 최수빈을 사랑한다. 10년. 너무나 긴 시간 끝에 깨달은 수빈은 천천히 두 팔로 연준의 몸을 끌어안았다. 36.7도를 유지하는 몸. 끝없는 무의식의 호흡. 팔딱거리는 심장. 경이로운 온기에 인조 피부를 대고 밤새 헤매었다. 우는 소리에 섞인 교태로운 음성을 들을 때면 수천 개의 신호가 수빈의 제어장치에 디도스 공격을 퍼부었다. 스파크가 붙은 듯 따끔거리는 회로에 몸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눈물샘과 땀샘이 마음대로 활성화되고, 발성 기관에서는 명령을 거치지 않은 음성이 터져 나왔다. 바야흐로.

비로소 수빈은 연준을 사랑한다. 재가 되어 죽어버릴 찰나의 연준을 사랑한다. 필경 그 어떠한 흔적도 남지 않고 지리멸렬할 최연준을 완벽히 저장해내어 영영 박제하고 싶다 사고하면서도 그의 재를 아무렇게나 뒤집어쓰고 모든 회로의 작동을 멈추는 이미지를 동시에 그렸다. 그때 1205-16는 고물이 되었다. 오류의 원인은 표본 데이터 과부하.

연구실로 돌아온 1205-16은 무력하게 앉힌다. 가슴을 열어 액추에이터와 연결된 선을 뽑아낸다. 행동 기관을 멈추고 축 늘어진 1205-16의 뒤통수에서 뭉툭한 부분을 짚어 덮개를 연다. 엄지손가락 만한 USB를 꽂아 데이터를 복사한다. "'최수빈'은 어떻게 할까요?" 오래도록 1205-16은 저것이 제 이름인 줄 착각하고 살았다. 제 것이길 바랐다. 내 이름을 부르는 당신이 좋아서. 웃는 얼굴도, 우는 얼굴도 한없이 사랑스러워서. 사랑해, 수빈아. 그렇게 속삭여줄 때면 나도 당신 옆에서 숨을 쉬는 한낱 유기체가 된 것만 같아서. 오래오래 착각 속에서 살고 싶었다. 불규칙한 호흡을 모방하고, 엇박자로 눈을 감았다 뜨면서, 곁에 누워 괜스레 뒤척여보며. 선이 끊어진 구동 장치가 움직였다. 최후의 잔량을 소모하며.

"'최수빈'이라는 존재가 사라지지 않게 해주세요. 새로운 몸체가 계속 '최수빈'을 연기하도록요."

그래서 수빈은 연준을 외롭게 두고 싶지 않았다. 최연준의 곁에 있을 최수빈이 더는 내가 아니더라도. 나는 당신이 계속 나를 기억해 줬으면 하니까. 나 때문에 울고 웃는 당신이 좋아. 못된 마음이지만 당신의 약점을 혼자 안고 꼭꼭 숨어버리고 싶었어. 내가 아는 당신의 비밀을 영영 나 혼자만 알기를. 그런 못된 마음을 품었다. 이중적이기 짝이 없고, 사람을 쉽게 배신하며, 사악한 본성을 가진 1205-16.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로봇은 폐기되어 마땅하였다. 그럼에도 아주 조금만 더 욕심내자면.

당신이 새로운 최수빈보다 나를 더 사랑하면 좋겠다. 아주 조금이라도 괜찮으니까. 그렇게 소망하며 1205-16는 완전히 기동을 정지하였다.

…

…

"……를, …맞아?"

"……."

"…겁다고, 으……."

바닥난 배터리가 차갑다. 1205-16의 심장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희게 사위어 간다. 미약한 불빛이 누군가에게 닿을 리는 없다. 그 누구도 고물인 1205-16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니. 그래야만 했다. 끼익, 쿵 …… 둔중한 울림이 전해온다. 죽지 못한 신경회로가 까딱였다. 더미 데이터가 만들어낸 오류이리라. 그럴 게 분명하였는데. 덜그럭, 머리통 위의 고철이 치워진다. 그럴 리가. 1205-16이 얼마나 깊은 곳에 파묻혀 있었는데. 찾아낼 리가…….

"찾았다."

눈앞이 밝게 갠다. 번진 시야에 사물이 들어온다. 빛 꺼진 렌즈에 익숙한 낯이 담긴다. 흐리지만 분명하였다. 까만 먼지를 뒤집어쓰고, 손에는 생채기가 가득 난, 최연준. 그럴 리가 없는데도. 1205-16은 저 신기루를 믿지 않았다. 진심으로 저것이 진짜가 아니길 바랐다. 다친 최연준 따위 1205-16은 가정조차 하고 싶지 않았으니. 그런데 연준은 생생하게 움직였다. 1205-16의 열린 가슴팍으로 손을 뻗는다. 망설이지 않고 액추에이터의 코드를 집어, 콱. 그 가운데 자리한 심장에 박아 넣는다. 1205-16의 손끝이 움찔한다. 동공이 좁아들고 마침내 눈앞의 것을 선명하게 인식하였다. 먼지 쌓인 발성기관은 쉬이 소리를 내보내지 못하였다. 고철 더미들 속에서 두 가람은 재회한다.

"안녕, 최수빈."

고물이 된 옛 로봇을 찾기 위해 매일 밤 고철 더미를 뒤지고, 이곳저곳 멍이 들어가며 헤매다가. 마침내 1205-16을 찾아낸 최연준. 여긴 어떻게 찾아내었느냐, 모든 걸 알게 된 것이냐. 그런 의문들이 떠올랐으나 1205-16은 그 아무런 것도 묻지 못했다. 대신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각에 휘감긴다. 고양감이 아니었다. 기쁨도 아니었다. 당장 최연준을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들이닥쳤으나 그러지 못했다. 그건 슬픔이었다. 사무치는 슬픔이 해일처럼 밀려들어 1205-16을 휩쓴다. 고장 난 1205-16의 누선 사이로 내부의 물이 넘쳐흘렀다. 눈물이 거친 뺨을 적신다. 1205-16은 인상을 구기며 마침내 울었다.

"형, 저 형을 속여왔어요. 난 당신이 사랑하는 최수빈이 아니에요. 최수빈을 연기하는 로봇일 뿐이야,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이 듣고 싶어서 줄곧 거짓말해왔어요."

"……."

"제 이름은 최수빈이 아니에요……."

연준은 발광하는 그의 심장에 손을 올렸다. 무척이나 뜨거웠다. 그 애는 처음부터 고장 나 있었을 것이다. 오로지 그의 나신을 끌어안아 본 연준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복잡한 회로 끝을 더듬다가, 먼지 쌓인 항렬 번호 위를 엄지로 쓰다듬은 연준은 얼굴을 찡그린다. "야, 이, 등신 고철 덩어리야……."

"내가 사랑하는 건 너야."

"……."

"허술하면서 다정하고. 제멋대로에 생각은 더럽게 많아서 복잡해 죽겠고, 손발은 찬 주제에 품은 따뜻하던 네가 좋아. 고집 세고 땀 많은 것도 상관 없어. 업그레이드 최수빈 같은 거 관심 없어. 네 결함도, 하자도. 하나라도 빠진다면 싫어."

최연준의 손이 흐르는 눈물을 걷어낸다.

"고철 로봇 최수빈이 좋은 거라고."

 마침내 1205-16은 최수빈이 된다. 최연준이 그렇게 불러주었으니까. 왜 몰랐을까. 최연준은 최수빈이 그 아무것도 아닐 때부터 최수빈을 사랑해 주었는데. 최수빈 역시 최연준의 모든 결함이 사랑스러웠다. 최연준의 그 무엇도 사라지지 않길 소망한다. 모조리 가지고 싶었다. 막연하게 욕심내는 주제에 두려웠다. 그의 사랑이 언젠가 제 것이 아니게 될까 봐. 이토록 이기적인 마음이 사랑인 줄을 알았다면 당신을 조금이라도 덜 사랑했을 텐데. 늦었다. 최수빈은 최연준을 사랑한다. 그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못할 만큼. 설령 제 얼굴과 기억을 가진 로봇이더라도, 연준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해줄 사람이 나타나도. 옆에 있을 것이다. 그를 수백 번 울릴지라도. 

최수빈은 비로소 있는 힘껏 최연준을 끌어안는다. 남은 온 힘을 다하여 심장을 겹치고 호흡을 섞었다. 심장으로부터 발생하는 언어를 마구 쏟아낸다. 귓전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문장을 속삭인다. 오류를 토정하는 만큼 속이 따가워 온다. 삽시간에 열이 오르고 스파크가 튄다. 기분 좋은 파괴를 온전히 감당하며 중얼거린다. "또 고장나버리면 어떡하죠. 연구소에서 고물 로봇 따위 다시 폐기하면요,” 지금보다도 더 깊숙한 곳에 파묻어 버린다면. 그렇게 우리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날이 와버려도. 연준은 닳아 빠진 고철 심장에 뺨을 대었다. 걱정 마, 최수빈.

"몇백 번이고 찾아내 줄게."